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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켓] 로켓은 어떻게 등장했을까?

공학/우주로켓공학

by 도서관경비원 2024. 3. 2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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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아이작 뉴턴의 겸손을 표현할 때 인용되는 문장이다. 과학과 공학은 모두 사회의 일부이다. 과학자 또는 공학자는 모두 사회에서 타인에게 둘러싸여 있고, 과거와 현재를 불문하고 수많은 타인에게 개념, 자료, 법칙, 원리, 모형, 도구, 방법 등을 도움받는다. 어떤 공학자일지라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누가 한 말인지 불분명하지만, 공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공학적 성과는 과거와 현재 사회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사람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래서 그 성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의 경과를 알지 못하면 새로 만들 무언가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개발한 게 될 것이다.
 
로켓(rocket)은 로켓에 포함된 연료를 연소시켜서 만들어진 가스를 노즐(nozzle)로 후방에 분사하면서 생긴 반작용으로 추진력을 얻어서 전방으로 날아가는 비행체를 말한다. 또는 추진 장치인 로켓의 액체 엔진(engine)이나 고체 모터(motor)를 직접 가리키기도 한다. 로켓은 추진력을 만드는 에너지 물질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서 산소가 희박한 대기권이나 산소가 없는 진공 상태의 우주 공간을 비행할 수 있다.
 
과거에는 엔진(engine)이란 단어는 무언가 힘을 만드는 장치를 의미했다. 또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구동하는 장치를 모터(motor)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두 단어를 명백하게 구분한다. 추진 장치의 원료가 액체일 때는 엔진, 고체일 때는 모터라고 부른다. 그러니 굳이 액체 엔진이나 고체 모터라고 부를 필요도 없지만,  내포된 의미를 그 단어로는 금방 알 순 없기 때문에 액체 엔진, 그리고 고체 모터라고 하자.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테슬라 박물관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빨간 색 부분에 모터로 적혀 있다.

로켓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로켓의 역사는 화약(火藥)의 발명과 함께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10세기쯤 중국에서 초석(질산칼륨)을 주성분으로 흑색화약(black powder)을 발명하였다. 이후 13세기쯤 중국이 화약을 이용한 화전(火箭)이라는 무기를 사용했다고 문헌에 남아있다. 이 화약 기술이 송(宋)에서 원(元), 인도, 아라비아를 거쳐서 유럽에 알려지면서 불꽃놀이와 무기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불꽃놀이는 한자어로 연화(煙花)라고 하는 데 우리말로는 연화는 적합하지 않다. 이 단어를 잘 사용하지도 않거니와 첫 번째 뜻은 '봄의 경치'를 의미한다. 또 화포(花砲)라고도 하는 데, 화약의 힘으로 탄환을 쏘는 대형 무기인 화포(火砲)와 혼동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불꽃놀이는 그냥 불꽃놀이이다.
 
19세기 초 영국의 윌리엄 콩그리브는 고체로켓에 안정봉을 붙인 무기를 개발했다. 이 로켓은 대략 3km 가까이 날아갔고, 영국군은 이 로켓을 1814년 미영 전쟁에서 영국군의 함대가 미국 동해안의 도시인 볼티모어의 요새를 공격할 때, 콩그리브의 로켓 무기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당시 총포가 엄청나게 발전해서 정확성이 떨어지는 로켓은 전쟁에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비행 안정성(stability)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정봉을 붙인 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뒤 영국의 윌리엄 해일은 로켓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로켓을 회전시키는 스핀 안정형 로켓을 고안했다. 이처럼 화약의 발명으로 시작된 로켓은 합리적인 ‘과학’으로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무기’로만 발전하였다. 결국 로켓은 이성 잃은 인간에게 칼을 쥐어 준 결과가 되어버렸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로켓의 우주 비행 가능성을 연구한 3명의 선구자가 있었다. 그 선구자는 바로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 독일의 헤르만 오베르트이다. 당시 유럽은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쳤으므로 러시아, 미국, 독일에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게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으며, 청각 장애가 있었지만, 홀로 로켓을 연구했다. 선구자는 언제나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하는 법이니까. 그는 우주여행용 액체로켓을 고안했고,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현실화되는 질량비, 다단식 로켓 등 로켓 공학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57년에는 구소련에서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다.

칼루가 미라 광장에 위치한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기념비

미국의 로버트 고더드는 로켓 추진을 이용한 우주여행을 연구했고, 1926년 3월 액체산소와 케로신(kerosene, 등유)을 이용하여 액체로켓 발사 실험을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때 비행시간은 2.5초, 도달 고도는 12.5m를 기록했다. 액체 로켓에서는 연료와 산화제의 조합이 중요한 데, 이 조합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등유는 당시 등불을 켜고 난로를 피우는 데 쓰거나 농업용 발동기의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등유를 로켓 연료로 사용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가 1919년 『고고도에 도달하는 방법』이란 책을 출간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클라크 대학의 로버트 고더드 교수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진공 상태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른다.”라고 비난했다. 언제나 과학의 시작은 의심받기 마련인가 보다. 1969년 7월, 아폴로 우주선이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을 향해 비행할 때 「뉴욕타임스」는 “뉴턴의 발견은 옳았다. 로켓은 진공 상태에서도 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라고 정정하였다.

 

루마니아 태생의 독일 과학자 헤르만 오베르트는 소년 시절부터 우주여행에 열중하였고, 기구한 운명을 겪으면서도 평생 우주를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동시대 루마니아의 앙리 코안다는 1950년대 터보 프로펠러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루마니아의 국제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딴 앙리 코안다 국제공항이다. 헬리콥터의 선구자 그리고레 브리쉬쿠, 로켓의 선구자인 헤르만 오베르트, 공기역학의 선구자인 앙리 코안다를 배출한 루마니아는 당시 항공 기술의 강국이었다. 헤르만 오베르트는 1923년 『행성 공간으로의 로켓』이라는 책을 써서 우주 비행의 기초 이론을 확립하는 동시에 우주여행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 책은 전문가에게 혹평을 받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잘 팔렸다. 게다가 그의 영향으로 1927년 독일에 ‘우주여행협회’가 설립되었고, 젊은이들 사이에 굉장한 붐을 일으켰다. 이것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나치(Nazi)가 출현하면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이었다. 

 

이 세명의 선구자는 로켓의 우주 비행이라는 새로운 생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선구자이자 천재 과학자였다. 하지만 정부를 움직여서 조직적으로 우주개발을 시작하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헤르만 오베르트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최초의 로켓을 개발한 베르너 폰 브라운은 헤르만 오베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헤르만 오베르트는 우주선의 가능성을 생각할 때 로드 맵을 가지고 수학적으로 분석한 개념과 설계안을 제시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켓과 우주 여행의 이론적, 실제적 측면에 대한 첫 번째 접촉도 그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우주 비행 분야에서 그의 획기적인 공헌에 대해 과학 기술사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2차 세계대전 초기 베르너 폰 브라운을 중심으로 나치독일은 길이 14m, 발사 중량 13톤의 로켓이자 미사일인 「보복 병기 2호(V-2)」를 개발하였다. V-2 미사일은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가 개발한 액체 연료 로켓을 복사하여 로켓 개발을 시작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로버트 고다드는 입수한 V-2를 면밀히 조사한 끝에 자신의 기술을 나치독일이 훔쳤다는 걸 깨달았으며 베르너 폰 브라운도 고다드의 로켓이 자신의 로켓 개발에 기여했다는 걸 인정했다. 

V-2 미사일

V-2 미사일은 1942년 10월 독일군의 시험장에서 발사되었고, 예정대로 60km의 고도까지 비행에 성공하였다. 이것이 근대 제1호 로켓의 탄생이었다. V-2는 최고 속도 마하 5(음속의 5배), 약 300km 떨어진 곳에 750kg의 ‘탄두(彈頭)’를 떨어뜨릴 수 있는 진짜 로켓이었다. V-2의 액체로켓과 유도 기술은 당시에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로켓 과학이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또는 로켓 공학이 인류를 위한 실용적인 시설이나 물건의 발명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인류를 파괴할 지도 모르는 로켓이나 미사일이라는 무기로 발전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폰 브라운, 1959년 마셜 우주 비행 센터 사무실

2차 세계대전 이후 V-2의 기술은 미소 양국으로 연결되었으며, 이후 대형 우주로켓을 개발하는 길을 개척하였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진행한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독일의 페네뮌데에서 V-2를 개발한 폰 브라운 박사를 비롯한 642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우주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특히 폰 브라운은 지도자로서 미국의 가장 빛나는 시대의 우주개발을 강력히 추진했다. 전후 연합국 간의 협상 결과로 독일의 페네뮌를 점령하기로 한 구소련은 남아있던 자료와 기술자를 데려가 구소련의 우주 기술 개발에 기여했다. 전후 구소련, 미국,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우주로켓을 개발했지만, 이것은 모두 V-2 로켓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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