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라부아지에의 만찬회

2025. 3. 2. 17:40과학/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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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회의 주최를 맡은 사람은 앙투안 라부아지에라는 화학자이자 지역 명사였다. 부모로부터 약간의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이른바 징세 업자로 일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에 돈을 내고 정부를 대신하여 징세할 권리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평판이 나쁜 제도였고,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결국 후년에 이 제도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라부아지에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어, 거리에 가로등을 설치하여 파리의 거리를 밝게 하자는 계획에도 참여했다. 다른 남자로부터 빼앗은 마리안이라는 소녀와 그녀가 13살 때 결혼했다. 그녀는 그의 좋은 파트너이자 조수였다. 실험실에서는 거의 매일 5시간씩 함께 있었다. 일요일은 특별한 날로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실험실에 함께 있었다. 마리안에게는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습득한 영어를 활용하여 라부아지에를 위해 최신 과학 논문을 번역하고 있었다. 또한 실험의 개요를 스케치하거나 실험 결과도 빠뜨리지 않고 상세히 기록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야심가였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상당한 자금과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이렇다 할 발견이 없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77410월 만찬회에서 프리스틀리에게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라부아지에에게는 큰 행운이 찾아온다.

 

〈라부아지에와 그의 부인, 자크 루이 다비드, 1788.

 

만찬회 당일 프리스틀리는 아마도 분위기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화려하고 호화로운 방, 눈앞의 테이블에 차려진 잔칫상. 게다가 주인은 부유하고 매력적이며 재치 있는 프랑스 귀족이다. 그때의 모습을 '거리의 명사들이 참석했다'라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고 있다. 요리가 차례로 나르는 동안 프리스틀리는 불꽃을 맹렬하게 타오르게 하는 기체에 대한 실험 결과를 놀랍게도 모두 라부아지에에게 말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 만드는 방법까지도 말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라부아지에는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 부부나 동석한 초대 손님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하긴 그럴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과학 지식의 해방이라는 시대 최고의 정신을 스스로 보여준 셈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대립하던 중이었다. 프리스틀리는 당연히 이때 일을 매우 후회하였다. 만찬회가 끝나자마자 라부아지에는 실험실로 날아갔다.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한시라도 빨리 재현하고 싶었다. 이로써 두 사람은 경쟁자 관계에 들어갔다.

 

산화수은을 구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수은 염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매독에 효과가 있는 몇 안 되는 약 중 하나로 여기저기서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부아지에는 산화수은을 가열하여 발생한 기체를 채취했다. 그 기체는 바로 프리스틀리가 말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실험을 이것으로 끝내지는 않았다. 지금 한 일을 반대로 해 보려고 한 것이다. 채취한 기체, 즉 산소 속에서 수은을 가열해 보았다. 그렇게 하니 예상대로 원래의 산화수은이 된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징세 업자의 일로 쌓은 계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실험을 진행했다. 반응으로 얻은 모든 것의 무게를 달아 보았지만, 수은을 가열하기 전과 후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 수은과 산소를 더한 무게가 생성된 산화수은의 무게와 일치한 것이다. 이 사실은 산소 자체의 발견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훨씬 더 중요했다.

 

라부아지에는 화학반응이란 물질이 결합하거나 분리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순한 원소가 다양한 조합으로 결합하여 물질이 만들어지고, 우리 주변에 보이는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놀라운 기체에 산소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바로 그였다. 산소의 발견은 과학사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생명의 활동을 유지하는 기체이며,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물건을 계속 태우는 기체이기도 하다.

 

라부아지에의 실험실

 

영국으로 돌아간 프리스틀리는 당연히 재미가 없었다. 자신의 발견을 가로채고 이름은 마음대로 바꿔버리니까. 이렇게 남기고 있다. “산화수은에서 얻은 물질에 대한 정보는 나에게서 들은 것이므로, 이와 같은 실험을 한다면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산소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리스틀리가 아니었다.

 

프리스틀리의 2년 전인 1772년에 스웨덴의 화학자 칼 셸레가 산화수은을 가열하여 산소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다만 이 발견에 관해 쓰인 책의 출판이 늦어져 1777년이 되어서야 한 것이다.

양자의 대립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얽힘이라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반복했을 뿐 아니라 실험 결과의 평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견해를 발표했다. 당시 대부분 화학자는 물체가 연소할 때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방출된다고 생각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물체를 태워도 금방 꺼지는 것은 이 플로지스톤이 공기 중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프리스틀리는 처음에 산소를 '탈 플로지스톤 공기'라고 불렀다. 그것은 촛불을 산소에 넣으면 격렬하게 타는 것은 산소에 플로지스톤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라부아지에는 당시 불완전하고 잘못된 학설의 가면을 필사적으로 벗기려고 노력했다. “화학은 더 엄격한 사고방식으로 되돌려야 할 때다"라고 썼다. 확실히 이 실험 결과를 최초로 발표하고 화제가 된 인물은 프리스틀리였지만, 실험의 의미를 최초로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라부아지에였다. 영국인이 조리하고 프랑스인이 맛보았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라부아지에가 산소를 단순한 하나의 공기로 보지 않고 물질의 기본 구성요소, 즉 하나의 원소로 생각한 점이다. 이로써 기체에 관심을 두게 된 라부아지에는 이후 물질의 성질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산소의 발견

 

과학사에서 산소를 '발견'했다고 하는 인물은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 외에도 예로부터 많이 존재한다. 1620, 노를 저어 나가는 잠수함이 만들어져 런던의 템스강 수면 아래를 항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금술사들의 손에 의해 잠수함 안에는 달콤한 공기가 감돌았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은 산소일지도 모른다.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자면, 뉴턴의 경쟁자였던 로버트 훅과 성냥의 발명과 보일의 법칙으로 알려진 로버트 보일은 17세기 후반, 연소에 관한 실험 중에 산소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펌프로 병에서 공기를 빼낸 후 그 안에서는 숯이 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보일은 화약의 원료이기도 한 질산칼륨을 그 안에 넣으면 숯이 다시 타는 것도 발견했다. 그렇다면 그는 공기와 질산칼륨 모두에 연소를 돕는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산소이다.

 

: 산소의 구조에 대한 현대적인 설명. 원자보다 작고 가벼운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데, 원자핵은 원자보다 훨씬 무거운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원자와 외부 '껍질'의 전자를 교환하고 공유함으로써 원자끼리 결합하여 분자를 구성한다. 이것이 화학반응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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