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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에 새겨진 집계 표시를 보면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이미 기원전 3만 년 전에 묶음으로 집계하는 방법을 생각했던 거로 보인다. 가장 인상적인 예시는 193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견된 어린 늑대의 정강이뼈이다. 길이가 약 7인치인 이 뼈에는 길이가 거의 같은 55개의 깊게 새겨진 홈이 묶음으로 다섯 개씩 배열되어 있다. 우리는 유사한 기록 표기법을 여전히 사용하며, 획을 5개씩 묶어서 과 같은 형태로 기록한다. 작은 마을의 투표 결과는 여전히 우리 원시 조상이 고안한 방법으로 계산한다. 오랫동안 이런 홈이 새겨진 뼈는 사냥 기록으로 해석되었으며, 홈은 사냥한 동물의 수를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이론에 따르면, 고대 사람들의 첫 기록은 바로 시간을 계산한 것이었다. 1880년대 후반 프랑스 동굴 유적지에서 발견된 뼈의 표시는 달의 연속된 위상에 포함된 날 수와 일치하는 반복되는 숫자 순서로 묶여 있었다. 이 홈이 새겨진 뼈들이 달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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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왕립 자연과학 연구소에 전시된 이상고 뼈

 

이상고(Ishango) 근처에서 발견된 또 다른 홈이 있는 뼈 화석이 나일강 상류의 주요 발원지 중 하나인 에드워드 호숫가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고고학적, 지질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 유적지는 기원전 17,500년경, 즉 나일강 계곡에 첫 번째 농경 사회가 등장하기 약 1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화석 조각은 조각, 문신, 또는 어떤 형태의 글쓰기에 사용한 도구 손잡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뼛조각은 세 개의 명확한 열로 배열된 홈들이 있으며, 불규칙한 구성을 보면 장식보다는 실제 사용했다는 걸 암시한다. 하나에는 11, 21, 19, 9개의 홈이 한 묶음으로 배열되어 있다. 기본 형태는 10+1, 20+1, 20-1, 10-1일 가능성이 있다. 다른 열의 홈은 8개 묶음으로 나뉘며, 3, 6, 4, 8, 10, 5, 5, 7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 배열은 복사(copy) 개념이나 두 배를 선호했다는 걸 암시한다. 마지막 열에는 11, 13, 17, 19개의 개별 홈으로 구성된 4개 묶음이 있다. 이 유형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일부 전문가가 추론하듯 소수와 친숙하단 걸 반드시 의미하진 않는다. 11+13+17+19=60이고, 11+21+19+9=60이기 때문에, 선사 시대의 이상고 뼈의 표시가 음력과 관련되었을 수 있으며, 첫 번째와 세 번째 열이 음력 2월을 나타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계산을 기록하는 데 사용한 집계 표시는 근동 지역의 선사 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불로 단단하게 구워져 내구성을 높인 작은 점토판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손으로 만든 유물은 다양한 모양으로 발견되었으며, 가장 흔한 형태는 원반형, 삼각형, 원뿔이다. 가장 오래된 점토판은 약 기원전 8000년경으로 추정되며, 평평한 표면에 평행선이 새겨져 있다. 가끔 흙에 뼈나 나무 막대기의 뭉툭한 끝으로 찍은 듯한 원형의 움푹 들어간 자국이 모여 있는 것도 있다. 이 유물은 사람들이 정착 농경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원시적인 계산 도구로 추정되며, ‘counter’token’으로 불렸다. 또한 형태가 다양한 상품의 종류를 상징할 가능성도 높다. 예를 들어, 특정 형태의 토큰은 가축의 수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으며, 다른 형태는 곡물의 양을 세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 수천 년에 걸쳐 토큰은 다양한 표시와 새로운 형태를 갖추며 점점 복잡해졌다. 결국 16가지 주요 형태의 토큰이 등장했다. 대부분의 토큰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보관할 때 끈으로 묶어 사용할 수 있었다. 토큰을 이용한 정보 기록은 기원전 3000년경 점토판에 글자를 기록하는 방식이 급속히 확산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다양한 시대와 지역에서 사용된 기록 방법 중에서 하나는 톱니 모양의 막대기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기록을 남기는 가장 초기 형태 중 하나이지만, 그 사용은 결코 원시 부족이나 먼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집계 막대기가 약속어음이나 환어음으로 인정받은 건 영국 재무부 집계 막대기에서 가장 높은 발전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는 12세기부터 정부 기록의 필수적인 부분을 담당했다. 이 경우 집계 막대기는 약 6~9인치 길이와 최대 1인치 두께의 헤이즐넛 나무 조각이었다. 집계 막대기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홈이 새겨졌으며, 각 홈은 금액을 나타냈으며, 홈의 너비에 따라 값이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1,000파운드의 홈은 의 폭만큼 컸고, 100파운드의 홈은 엄지손가락의 두께만큼, 20파운드의 홈은 새끼손가락의 두께만큼 컸다. 대출이 이루어지면 적절한 홈을 파고 막대기를 두 조각으로 나누어서 각 조각에 움푹 팬 홈이 나타나도록 했다. 채무자가 한 조각을 보관하고 재무부는 다른 조각을 보관했다. 따라서 두 조각을 맞추어 홈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서 거래를 쉽게 검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계정이 일치한다라는 표현이 유래했다. 아마도 두 조각이 일치하면 재무부는 자기 조각을 소각하거나 홈을 잘라내어 다시 매끄럽게 만들고, 채무자의 조각은 기록하려고 보관했을 것이다. 관습을 고수하는 태도 때문에, 이 나무 막대기를 사용한 회계 시스템은 은행이 등장하고 현대적인 숫자 표기법이 등장하여 이 관습이 구식으로 변한 다음에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관습을 폐지하려면 1826년에 시행된 의회 법안이 필요했다. 1834, 오랜 기간 쌓인 집계 막대기를 하원을 난방하는 화로에서 태울 때 불이 났고, 더 큰 화재로 번지면서 옛 의회 건물들을 태워버렸다.

 

 

영국은 집계 막대기의 독특한 특징을 주목했다. 과거에 누군가가 영국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면, 그 금액은 집계 막대기에 기록한 다음, 막대기를 두 조각으로 나누었다. 은행이 보관한 부분은 foil이라고 불렸고, 나머지 반쪽은 stock으로 불렸으며, 은행에 맡긴 금액을 증명하는 영수증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그는 stockholder가 되었고, 정부에서 발행한 종이 화폐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 bank stock을 소유하게 되었다. stockholderstock을 종이 화폐로 바꾸길 원하면, stock은 은행이 보관한 foil과 세심하게 비교하였고, 일치하면 stockholder의 막대는 화폐로 환급되었다. 따라서 화폐로 바꾸려고 제출한 증명서가 나중에 check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무로 만든 집계 막대기를 사용하는 방법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일반적이었으며, 최근까지 계속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스위스의 일부 외딴 계곡에서는 공동 목장에서 소를 키우는 농민들 사이에 거래를 증명하려고 우유 막대기를 사용하였다. 매일 목장 관리자는 물푸레나무로 만든 6각형 또는 7각형 막대기를 깎아 빨간 분필로 색칠하여 새긴 선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각 농부의 개인 표시 아래에 목장 관리자는 그 농부의 소가 생산한 우유, 버터, 치즈의 양을 표시했다. 매주 일요일 교회 예배가 끝나면 모든 목동이 모여 결산을 진행했다. 집계 막대기는 1800년대 중반까지 법적으로 유효한 문서로 인정되었다. 나폴레옹이 1804년에 제정한 프랑스의 첫 현대 법전인 민법전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포함되었다.

 

주식과 일치하는 집계 막대기는 이 방식으로 교환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의 계약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실제 집계 방법의 다양성은 너무 많아서 상세히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끈에 매듭을 묶어 날짜와 물건을 세는 방법은 오랜 전통이 있어 언급할 가치가 있다. 이 방법은 고대 그리스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 헤로도토스(기원전 5세기)의 저서에도 언급되었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이오니아인에게 달력으로 사용할 매듭이 묶인 끈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은 가죽 끈을 가져다가 60개의 매듭을 묶고 이오니아의 지배자들을 소집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매일 한 개의 매듭을 풀어라. 만약 내가 마지막 날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너희는 주둔지를 떠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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