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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사원이나 기념물이 고고학자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건축용 돌이 거의 없어서), 이 지역에서 고대 세계의 발굴은 이집트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현재 전 세계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바빌로니아 점토판은 최소 40만 개로 추정되며, 대부분 손바닥 크기이다. 이 중 약 400개의 점토판이나 조각이 수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거로 확인되었다. 이들의 해독과 해석은 수천 년에 걸친 언어의 방언 다양성과 자연적 변화로 느리게 진행됐다.

 

점토판 해독의 초기 단계는 괴팅겐의 독일 교사인 무명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1775~1853)가 시작하였다. 그는 고전 그리스어에 통달했지만, 동양의 언어는 전혀 알지 못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 그로테펜트는 페르세폴리스의 특정 쐐기문자 기록을 해독할 수 있다고 내기를 걸었다. , 그 주제에 대한 이전에 출판된 문헌을 제공해 줘야 가능하다고 조건을 걸었다. 그는 직감적인 추측으로 페르시아 쐐기문자를 읽는 열쇠를 발견했다. 문자의 배열은 쐐기의 끝이 아래로 또는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넓은 쐐기가 형성하는 각도는 일관되게 오른쪽으로 열려 있었다. 그는 이 언어의 문자가 알파벳 체계라고 가정하고,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문자들을 골라내어 이들이 모음이라고 추론했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문자들은 을 의미하는 단어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그로테펜트는 왕 중의 왕이라는 제목과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히스타페스라는 이름을 해독했다. 이후 그는 수많은 개별 문자를 분리해 내서, 12개를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그로테펜트는 이 번역에, 비록 수많은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내용의 대략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1802, 그로테펜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괴팅겐 과학 아카데미에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그로테펜트는 자신의 논문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학교수도 아니고, 동양학자도 아닌 이 알려지지 않은 학자의 업적은 학계에서 조롱받기만 했다. 어두운 출판물에 묻혀버린 그로테펜트의 뛰어난 발견은 잊혀졌고, 수십 년 후 쐐기문자가 다시 해독되어야 했다. 역사의 우연 중 하나는 신성문자를 처음 번역한 샹폴리옹(Champollion)이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게오르크 그로테펜트는 거의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점이다.

 

고대 세계의 발견 과정에서 흥미를 끌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면 중 하나는 헨리 크레스위크 롤린슨(1810~1895)베히스툰 (Behistun)의 거대한 암각 문자를 복사한 사건이다. 인도 군대 장교였던 롤린슨은 1835년 페르시아로 파견되어 왕의 군대에 자문관으로 근무하며 쐐기문자 비문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언어를 배우고 페르시아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수많은 고고학 유적을 탐구했다. 롤린슨의 관심은 곧 베히스툰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바빌론으로 향하는 고대 카라반 도로 위에서 웅장하게 솟아오른 '신들의 산'이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 절벽이 있다. 이곳에서 다리우스 대왕은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려고 특별히 준비한 150피트×100피트 크기의 표면에 영구적인 기념비를 새기도록 명령했다. 이 비문은 13개의 패널에 3개 언어(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바빌로니아인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 쐐기문자로 작성되었다. 페르시아어 글자 5개 패널 위에는 예술가들이 다리우스가 왕위 계승권을 다투던 10명의 반란 지도자의 항복을 받는 모습을 실물 크기의 부조로 조각했다.

 

이란 케르만샤주의 베히스툰 산에 있는 다리우스 1세 시대의 다국어 비문(베히스툰 비문)

 

베히스툰 비문은 일부 학자가 메소포타미아의 로제타 스톤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이 명칭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 로제타 스톤의 그리스어 문장은 샹폴리옹이 알려진 것에서 미지의 것으로 나아가도록 허용했지만, 베히스툰 삼중 언어 문장의 세 구절은 모두 동일한 미지의 쐐기문자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주로 43개의 기호로 구성된 알파벳 문자 체계인 고대 페르시아어19세기 초부터 심각한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문장의 이 버전은 결국 전체 쐐기문자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를 제공하게 되었다.

 

첫 번째 어려움은 긴 문구를 복사하는 데 있었다. 이 문구는 지면에서 400피트 위에 있는 바윗덩어리 표면에 새겨져 있었으며, 이 바윗덩어리 자체는 평원 위 1,700피트 높이에 솟아 있었다. 당시 조각가들이 작업을 마친 후 돌계단을 파괴했기 때문에 접근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 롤린슨은 문구에 접근하려고 거대한 사다리를 건설해야 했고, 때로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바위벽에서 갈고리에 매달려야 했다. 1837년 말까지 그는 414줄의 페르시아어 문장의 약 절반을 복사했고, 35년 전에 그로테펜트가 스스로 개발한 방법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여 첫 두 문단을 번역했다. 롤린슨의 목표는 베히스툰 바위에 새겨진 비문을 모두 필사하는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1839년에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롤린슨은 아프가니스탄으로 전근되어 그 후 2년 동안 포위 공격으로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다. 1843년에 그는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영국 영사로 부임하여 베히스툰 비문의 나머지 부분을 계속 복사, 해독, 해석하려고 열심이었다. 고대 페르시아어 부분의 전체 번역본과 엘람어 263줄의 사본이 1846년에 출판되었다. 다음으로 그는 기념비에 새겨진 세 번째 종류의 쐐기문자, 즉 엘람어 암반 위에 돌출된 무거운 바위 양쪽에 새겨진 바빌로니아어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롤린슨은 112줄의 문장을 종이에 찍어 복사본을 만들었다. 이미 번역된 페르시아어 문장에 포함된 수많은 고유 명사를 참고하여, 그는 총 246개의 문자에 올바른 의미를 부여했다. 이 작업 중 그는 바빌로니아 문자의 중요한 특징인 '다성음 원칙'을 발견했다. , 동일한 문자가 다음에 오는 모음에 따라 다른 자음 소리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롤린슨의 놀라운 노력 덕분에 쐐기문자의 수수께끼가 풀렸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방대한 기록은 이제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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