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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자의 일상/아랍에미리트

UAE를 세운 두 사람: 국부와 국모

by 도서관경비원 2026.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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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UAE)라는 나라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두 인물을 알아야 한다. 사막의 흙집 마을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나라로 바꿔 놓은 국부(國父)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 그리고 그 곁에서 여성과 가정, 아동의 삶을 끌어올린 국모(國母) 셰이카 파티마 빈트 무바라크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곧 UAE 건국의 이야기다.

알 아인 팰리스 뮤지엄

사막에서 배우고 자란 지도자

셰이크 자이드는 1918년경 아부다비에서 태어났다. 1922년부터 1926년까지 아부다비를 통치한 셰이크 술탄 빈 자이드 알 나흐얀의 네 아들 중 막내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알 아인에서 자랐다. 정규 교육 대신 그는 전국을 두루 여행하며 사막으로 들어가 베두인 부족과 함께 생활했고, 진주 채취와 매사냥, 낙타·아라비아 말타기, 사격 같은 경험을 통해 사막 사람과 그 문화를 몸으로 익혔다. 특히 매사냥은 평생의 열정으로 남았다.

 

이 시절의 경험은 그의 지도력에 뿌리가 되었다. 백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꿰뚫어 보는 안목, 그리고 땅과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여기서 나왔다. 셰이크 자이드의 깊은 종교적 신념과 관용의 이상, 선견지명, 결단력, 근면함, 너그러움을 헤아리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UAE를 이해하기 어렵다.

 

알 아인에서 시작해 아부다비 통치자로

1946년, 셰이크 자이드는 처음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다. 아부다비 동부의 알 아인에 통치자의 대리인으로 임명된 것이다. 당시 아부다비는 석유가 발견되기 전이라 개발되지 않은 해안 지대에 불과했고, 경제는 어업과 진주 채취, 오아시스의 소규모 농업에 기대고 있었다.

 

1958년 석유가 발견되고 1962년 최초의 상업용 유전이 생산에 들어가면서 나라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1966년 8월 6일, 셰이크 자이드는 형의 뒤를 이어 아부다비의 통치자가 되었다. 석유 수입이 불어나자 그는 대규모 건설 사업과 사회 기반 시설 확충, 교육 개혁을 힘차게 밀고 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석유가 가져온 부를 특정 계층이 아니라 국가의 모든 부문에 고루 나누는 데 힘을 쏟았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한때 트루셜 스테이츠로 불리던 빈곤한 7개 토후국은 부유한 독립 국가로 탈바꿈했다. 그는 1971년 12월 2일 연방 수립부터 2004년 서거할 때까지 UAE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국경을 넘은 나눔의 유산

셰이크 자이드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아낌없는 자선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인종과 피부색, 종교의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나눔의 본질이라 믿었고, 인도주의 활동이야말로 UAE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 신념은 제도와 숫자로 남았다. 1971년에는 아부다비 개발기금이, 1992년에는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 자선·인도주의 재단이 세워졌다. 1971년부터 2004년까지 그의 재임 기간에 UAE는 세계 117개국에 약 905억 디르함 규모의 원조를 전했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UAE가 건국 이후 2024년 중반까지 제공한 대외 원조 총액은 3,600억 디르함(약 980억 달러)을 넘어섰다.

 

그가 세상을 떠난 라마단 19일은 '자이드 인도주의의 날'로 지정되어, 국부의 나눔 정신을 이어받은 공공·민간 기관이 매년 기린다. UAE는 2017년을 '나눔의 해', 2018년을 '자이드의 해'로 선포하며 그의 가치를 국가 차원에서 되새겼다. 그의 이름은 국경 밖에서도 살아 있다. 미국 워싱턴의 소아외과혁신연구소, 그리고 2019년 런던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병원에 문을 연 자이드 희귀질환센터가 대표적이다. 2024년, 셰이크 자이드 서거 20주기를 맞아 모하메드 빈 자이드 대통령은 세계 취약 계층을 돕기 위한 200억 디르함 규모의 '자이드 인도주의 유산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며 그 정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2004년 그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거리는 텅 비었고 상점은 문을 닫았으며, 세계 각국의 지도자가 장례식에 모여들었다. 국민의 사랑을 받은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그 지혜와 비전으로 세계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부에 제시한 원칙과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국가 정책의 핵심으로 살아 숨 쉰다.

 

여성을 일으켜 세운 '국모', 셰이카 파티마

셰이크 자이드의 곁에는 국모로 추앙받는 셰이카 파티마 빈트 무바라크가 있었다. 그녀는 아부다비 알 아인의 알 하예르에서 베두인 가문의 딸로 태어나, 1960년대에 셰이크 자이드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배우자였고, 셰이크 자이드 역시 국가 발전에서 여성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두 사람은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함께 앞장섰다. '국모'라는 칭호는 2005년 3월 21일 세계 여성의 날에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그녀의 발자취는 UAE 여성 운동의 역사 그 자체다. 1973년 아부다비 여성개발협회를 세운 데 이어, 1975년에는 여러 여성 단체를 하나로 묶은 여성총연맹(General Women's Union)을 창립했고, 창립 이래 줄곧 회장을 맡아 왔다. 아이를 국가의 미래이자 진정한 부로 여긴 그녀는 아동 보호를 제도화하는 데도 힘썼다. 2003년 모성·아동 최고위원회를, 2006년에는 가족개발재단을 설립했다.

 

교육은 그녀가 가장 공을 들인 분야였다. 각 가정이 딸의 교육을 뒷받침하도록 장려했고, 1978년 UAE 대학교 설립 당시 여학생의 입학을 독려했다. 2004년에는 UAE 최초의 여성 내각 장관인 셰이카 루브나 알 카시미의 임명을 이끌었다. 그 결과는 뚜렷하다. 셰이카 파티마의 노력으로 에미리트 여성의 문해율은 90%를 넘어섰고, 오늘날 UAE에서는 2만 개가 넘는 사업체를 여성이 운영한다. 2016년 2월에는 22세의 청소년부 장관을 비롯해 여덟 명의 여성이 주요 각료로 임명되며 정부 전 부처에서 여성의 존재감이 커졌다.

 

그녀의 활동은 국경 안에 머물지 않았다. 여성 인권에 대한 공로로 500개가 넘는 국내외 표창을 받았고, 유엔 여러 기구의 인정을 받았다. 런던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병원의 자이드 희귀질환센터에는 그녀가 6,000만 파운드(약 2억 9,400만 디르함)를 기부하기도 했다. 여섯 아들과 두 딸을 둔 어머니이자, 지금은 현 UAE 대통령 셰이크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여전히 폭넓은 인도주의 활동으로 나라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세계 평화의 토대로 삼는 그녀의 비전은, 남편이 남긴 나눔의 정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두 사람이 남긴 것

셰이크 자이드와 셰이카 파티마의 삶은 각각 '통합'과 '포용'이라는 두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 사람은 흩어진 토후국을 하나로 묶어 세계 무대에 세웠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나라의 절반인 여성을 사회의 주역으로 일으켜 세웠다. UAE가 오늘날 관용과 나눔의 나라로 불리는 데에는 이 두 사람이 심어 놓은 뿌리가 있다. 그 유산은 지금 세대와 다음 세대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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