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 목행동, 그 시절의 공기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유신독재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던 그 무렵, 충주시 목행동에는 비료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인구 소멸 지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충주가, 그 시절에는 남한강 물줄기를 타고 제법 번성했던 곳이었다. 미국 엔지니어가 공장을 설치하러 들어왔다 돌아갔고, 서울과 충주를 잇는 비행장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돌사진은 컬러였다. 파독 간호사였던 이웃이 마침 귀국했을 때 첫 돌을 맞이했고, 사진을 찍어 독일에서 현상한 뒤 다시 가져왔다. 해외 선진 문물이 강줄기처럼 흘러들어오던 동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충주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 동네에 흑백텔레비전이 하나둘 늘어가던 시절, 옆집 소꿉친구의 집에는 특별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 Fidelipac 카트리지 테이프 — 소꿉친구가 불러주던 오후
카세트테이프가 아니었다.
나중에 한참을 찾아보고서야 이름을 알았다. Fidelipac 카트리지 테이프. 카세트테이프보다도 앞선 시대의 물건이었다. 소꿉친구의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새 카트리지 테이프가 생기면, 소꿉친구는 반드시 나를 불렀다.
"야, 나와. 만화영화 노래 듣자."
어른들이 LP를 올려놓던 그 시절, 두 아이는 카트리지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만화영화 주제곡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던 그 소리가 얼마나 신기했는지 — 기억은 오래되어 흐릿해졌지만, 그 오후의 설렘만큼은 아직도 가슴 어딘가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소리는 그렇게, 추억과 함께 저장된다. 테이프가 늘어져도, 기계가 고장나도, 마음 속 어딘가에는 지워지지 않는 방식으로.

🎶 들국화와 다락방 — 사춘기가 처음 어른의 음악을 들은 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카세트테이프가 집에 생겼다.
처음 산 카세트테이프는 《들국화》였다. 가난했던 집, 누나가 살던 다락방. 천장이 낮고 비스듬한 그 좁은 공간에 올라가 카세트테이프를 귀에 대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락방 특유의 먼지 냄새와 나무 냄새, 그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들국화의 선율.
어른들이 듣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어른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이였지만, 음악만큼은 나를 순간적으로 어른의 세계로 데려가주었다. 사춘기란 그런 것이었다. 음악 한 곡으로 세상이 달라 보이던 나이.
그 플레이어의 생김새보다, 다락방의 냄새와 들국화의 선율이 더 선명히 남아있는 것은 — 추억이란 결국 물건이 아니라 경험에 기댄다는 증거일 것이다. 물건은 사라져도, 그 물건이 데려다준 순간만큼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 워크맨의 시대 — 귀에 꽂으면 세상이 내 것이 되던
고등학교 무렵, 친구들의 귀에는 저마다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1979년 Sony Walkman이 세상에 나온 지 거의 10년. 이제 학생들이 들고 다닐 만큼 대중화된 시절이었다. 잘 사는 친구들은 대부분 AIWA를 들고 다녔다. 작고, 정밀하고, 손 안에 쥐면 뭔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기. 삼성전자의 《마이마이》, LG전자의 《아하》, 대우전자의 《요요》. 국산 브랜드들도 저마다 이름을 달고 쏟아져 나왔다.
나도 하나 있었을 텐데 — 정작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 가기 이전의 기억도 일부 남아있는 사람이, 이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플레이어가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물건은 기억을 되살리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지만, 경험이 없는 물건은 그냥 물건으로만 남는다는 것을 —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 CD와 반영구의 거짓말 — 은빛 원반이 약속한 것들
군대에서 제대할 무렵, 세상에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콤팩트 디스크(Compact Disc).
Sony와 Philips가 함께 빚어낸 이 은빛 원반은, 카세트테이프의 모든 단점을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오래 들어도 늘어지지 않고, 플레이어에 씹혀 구겨질 일도 없다고 했다. 반영구적이라는 말이 매혹적으로 들렸다.
누나가 CD 플레이어를 사줬다. 들고 다니다 충격을 받으면 CD가 튀었고, 긁히면 소리가 끊겼다. 반영구적이라는 약속은 결국 절반쯤만 지켜졌다.
"이 세상에 '반영구적이다'라는 말은 영구(永久)에 초점을 두기보다 반(半)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도 90년대는 CD의 시대였다. 새 앨범이 나오면 CD 가게에 달려가던 시절. 비닐을 뜯는 손의 설렘, 가사지를 펼쳐 읽던 기억. 그 의식(儀式) 같은 순간들이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 아이리버와 MP3 — 대한민국이 세계를 앞섰던 순간
1997년, 대한민국의 한 회사가 세계 최초로 상용 MP3 플레이어를 출시했다.
미국도, 독일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 먼저였다.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2003년, 아이리버 iFP-300을 손에 쥐었을 때의 그 뿌듯함. Apple의 아이팟이 나와 있었지만, 국산을 사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 진심으로 우리 것이 자랑스러웠던 시절이었다.
이후 PMP가 나오고, 내비게이터가 나오고, 하나의 기기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욕망이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폰이 나타났다. 세상이 — 정말로, 완전히 달라졌다.

📲 스마트폰이 삼킨 세계 — 편리해졌는데 왜 허전할까
아이폰 이후, 수많은 물건들이 스마트폰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MP3 플레이어, 카메라, 내비게이터, 동영상 플레이어. 가방이 가벼워졌다.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러 걸어가지 않아도 되고, 카세트테이프를 아껴 듣지 않아도 된다. 넷플릭스가 영화를 골라주고, 알고리즘이 취향을 분석해서 음악을 틀어준다.
편리해졌다. 분명히. 그런데 —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예전에는 카세트테이프를 사면, 앨범 전체를 들었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고 있는 숨겨진 트랙이 있었다. 그 트랙을 발견하던 순간의 기쁨. 앨범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였던 시절. 가사지를 펼쳐 읽으며 가수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상상하던 시간.
지금은 알고리즘이 골라준 타이틀곡만 듣는다. 나만의 숨겨진 곡은 사라졌다. 앨범의 서사도 사라졌다. 음악을 발견하는 기쁨이 사라졌다.
편리함이 앗아간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 개조형 아이팟 — 세미 아날로그로의 귀환
2014년에 단종된 아이팟이 아직도 팔리고 있다.
시중에 남아있던 아이팟을 정비해서 파는 것을 넘어, 팬들 스스로가 개조한다. 30핀을 USB-C로 바꾸고, 내부 메모리를 늘리고, 블루투스 송신기를 새로 달고. 케이스는 10년이 넘었지만 안에는 새 심장이 뛴다. 시대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이하고 아름다운 현상이다. 그리고 결국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1TB 개조형 아이팟. B&O A8 이어폰.
이성적으로는 시대착오이다.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는 세상에 굳이 기기를 하나 더 들고 다니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멜론에서 좋아하는 앨범을 패키지로 산다. 아이팟에 넣는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순서대로 듣는다. 알고리즘이 아니라 내가 고른 음악을. 타이틀 곡뿐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트랙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들을 생각이다.
"순수한 아날로그의 시대는 아니지만 — 세미 아날로그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 소리가 남기는 것
카트리지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만화영화 주제곡을 소꿉친구와 함께 듣던 충주 목행동의 오후부터, 개조형 아이팟으로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지금까지 소리를 담는 그릇은 계속 바뀌었다. 카트리지 테이프에서 카세트테이프로,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CD에서 MP3로, MP3에서 스트리밍으로. 그리고 다시, 아이팟으로.
그러나 소리가 가슴에 닿는 방식만큼은 — 그 오후의 소꿉친구 집에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음악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 다만 듣는 방식이 바뀔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 가장 좋은 방식은, 내 마음이 가장 크게 울리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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