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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이 단단한 도로는 상하수도보다 더 초기의 엔지니어링 성과일 수 있다. 사람들은 기원전 4000년 전에 아시리아에서 조약돌 위를 걸었을 것이며, 나중에 바빌론에는 벽돌과 석회암으로 된 포장도로가 있었을 것이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는 다리로 이어지는 유명한 행진하는 거리의 기초는 아스팔트로 덮인 벽돌이었다. 경사진 교차로에는 석회석 표시가 아스팔트에 설치되었다. 도로는 길이와 너비가 3~4피트에 달하는 큰 돌로 포장되었다. 사람이 다니는 인도는 일종의 역암인 붉은 각력암의 작은 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리의 교각 기초 7개가 강바닥에서 발견되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이 다리는 네브카드네자르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교각은 작은 불에 구운 벽돌로 만들어졌지만, 그 크기는 상당했다. 각 부두의 크기는 약 30×70피트였다. 그들은 해류의 힘을 줄이기 위해 상류 쪽은 끝이 뾰족하고 기초를 훼손할 수 있는 소용돌이를 줄이기 위해 하류의 끝은 둥글게 만들었다.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돌 블록으로 포장된 도로를 운반하기 위해 두 줄의 촘촘한 간격의 나무 세로 보가 이 교각 위로 지나간 것 같다. 다리의 길이는 400피트였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일종의 군사적 예방 조치로 추정되는 도개교의 개폐부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중동의 모든 초기 문명에는 주로 행정 및 군사 목적으로 설계되고 유지되는 다양한 도로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거의 나와 있지 않다. 아시리아에는 짐수레를 위한 땅을 고르고 임시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움마니(ummani)라고 불리는 특수 부대가 있었다. 그들이 건설한 도로는 전쟁뿐 아니라 평화로운 시기에도 상업과 여행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는 기원전 6세기에 왕의 길을 가졌다. 소아시아의 사데(Sardis)에서 페르시아만 근처의 수사(Susa)까지 1,500마일이 넘는 거리에 그는 자기 사자들을 계속해서 그곳으로 오도록 했다. 이 큰 도로는 산길과 황무지를 가로질러 정보를 제공했다. 이것은 에게해로 향하는 서쪽의 길을 열었고 마라톤에서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의 역사적 충돌을 위한 길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고학자들은 과거의 이 유명한 고속도로에 대한 물리적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공학 유형에 대한 정보도 없다.

 

이집트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해상 운송이 도로를 통한 통신보다 더 중요했다. 식량을 생산하는 문명이 발흥하기 전에는 상당한 양의 물품을 물로 운송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기원전 3000년 이후 설계자들이 목재 작업 및 결합에 대한 지식을 늘리면서 상당한 크기의 선박이 발전했다. 사람들은 노를 사용하여 이 배를 추진했지만, 기원전 3000년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올바른 방향으로 불면 바람의 힘이 노잡이의 노력을 보충할 수 있도록 조잡한 돛이 추가되었다. 이 단일 돛은 항상 배가 회전하는 지점 앞쪽에 있는 돛대에 부착되어 있었고, 배의 축에 직각으로 해당 위치에서 멀리 움직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선원들은 후진에서 바람이 불 때만 돛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오벨리스크 선박

 

가장 큰 배는 자체 추진이 아니었지만 노를 젓는 사람과 아마도 한 개의 돛을 갖춘 작은 배에 의해 견인되었다. 기원전 2400년경 이집트인들은 아마도 길이가 약 100피트인 대형 선박 중 하나를 만들었다. 즉, 1620년에 순례자들을 매사추세츠로 데려간 메이플라워호보다 길이가 90피트 더 컸다. 그림과 같이 기원전 1600년경의 배 주갑판의 끝에서 끝까지 배치된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운반한 오벨리스크의 길이는 아마도 최소 220피트였을 것이다. 나일강 아래로 화물을 운반하려면 세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작은 노 추진 선박이 필요했다. 크기와 관계없이 이 시대의 모든 선박은 주로 인간의 노력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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