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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화이트는 지금은 고전이 된 ‘중세의 기술과 발명’이라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중세 후기의 가장 큰 영광은 대성당이나 서사시, 스콜라주의가 아니라 땀 흘리는 노예나 쿨리 같은 인간이 아닌 동력에 기초한 복잡한 문명을 역사상 처음으로 구축한 것’이라고 썼다. 중세의 동력 혁명은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발전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쇠퇴 이후 몇 세기 동안 서양에서는 암흑기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그 시대에 성직자 외에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개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성공적으로 응용한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그들도 오래도록 중요한 발명품을 만들었다. 로마의 장벽이 약해지면서 유목민들이 서유럽을 휩쓸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이 수메르나 이집트 이전의 원시 상태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이방인들은 새로운 많은 지식을 가져왔고 서양 문명에 많은 새로운 장치를 제공했다. 이방인들은 소형 주택과 높은 나무 첨탑과 같은 공학적 혁신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지, 버터, 비누 등을 가져왔다.

 

이방인들이 지식과 기술을 제공한 문명은 대부분 그레코로만 세계의 로마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물론 과학과 기술에 관해서는 유럽의 기독교 사회는 순수과학보다는 공학을 강조하는 로마의 전통에 속해 있었다. 중세 시대에 그리스 과학과 기술을 계승하고 유지한 것은 이슬람교였다. 서양 학자들이 아랍어 과학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12~13세기까지 서양에서는 과학 활동이 거의 없었고, 이슬람교도들은 500년 전에 이미 그리스 과학 서적의 대부분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따라서 고대에 로마인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두 가지 다른 전통은 13세기까지 서로 분리되어 지속되었다. 라틴 문화를 이슬람교도들이 전수하고 보강한 그리스 과학 지식을 이어받기 시작하면서 두 전통은 융합하기 시작했다.

 

View of saint Peter basilica from a roof.jpg

성 베드로 대성전

 

노예를 이용한 비인간적 동력 자원을 개발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은 노예 제도의 쇠퇴와 기독교의 지속적인 부상이었다. 린 화이트가 지적했듯이 중세 기술의 역사는 어느 정도는 종교의 역사이다. 인간의 무한한 가치에 대한 기독교적 이상과 지능이나 판단력이 필요 없는 노동에 인간을 복종시키는 것에 대한 상대적 혐오감은 인간의 근육을 대체하는 기계적 힘의 진화를 부추긴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기독교 윤리가 부분적으로 동력 공학의 부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동력 공학은 기독교적 이상을 더 크게 실현할 수 있게 해주었고, 서구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성장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물론 중세 엔지니어들은 동력 공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콘크리트 시공과 도로 건설 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형태의 로마 공학을 발전시켰다. 건물, 교량, 운하 및 다양한 도시 개선 공사에서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중세에 시작된 인간 삶의 방식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온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동력의 주체가 되기 시작한 새로운 동력 공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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