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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0년 이전 어느 때. 최초의 정착민들은 구석기 시대에 사람이 별로 없었던 그리스에 도착했다. 고든 차일드(Gordon Childe)는 그의 저서인 ≪유럽의 선사시대 이주(Prehistoric Migrations in Europe)≫에서 이 초기 그리스 세스클로(Greek Sesklo) 문화는 실제로 그 후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쪽에서 왔다고 한다. 이 민족은 위대한 능력을 갖췄고, 그 후로 세계를 놀라게 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리스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의 삶은 농경 생활이었다. 그들이 땅에 정착하면서 그들의 사회 조직은 부유층과 빈곤층, 귀족과 하층민으로 구성된 복잡한 체계가 되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하고 그 위에 세운 제도는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호메로스가 그들을 불멸의 서사시로 남긴 것은 인류에겐 영광스러운 일이다. 기원전 5세기경 호메로스가 묘사한 농촌 사회는 한편으로는 서사시와 같은 미학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스파르타의 복잡한 군사 과두정,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이 완성된 아테네의 도시 민주주의로 변모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모두 노예 노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그 차이를 동료에 대한 대조적인 태도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전사의 단순한 충성심을 아테네 시민의 복잡한 공공 정신으로 바꾼 역동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오랫동안 철학자와 역사가를 매료시켜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리스인이 예술, 드라마, 철학, 과학, 건축 분야에서 이룬 업적이 워낙 다양하고 방대하므로 그리스인이 왜 그렇게 했는지 분석하기보다는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는 것조차도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

 

View of the Acropolis Athens (pixinn.net).jpg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기원전 6세기부터 3세기까지 그리스의 과학적 업적은 공학 분야의 적극적인 발전으로 이어졌다. 초기의 거의 모든 지식은 '경험의 결과'로 얻어졌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6세기 이전에는 자연 현상이나 수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이 없었다. 의식적으로 표현되거나 정의된 '자연의 법칙'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연 안에 모든 단계의 근간이 되는 명확한 규칙성이나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규칙성에 대한 의식 없이는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과학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 질서이므로 자연에 질서라는 개념이 없는 과학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 과학의 가장 큰 영광은 아마도 과학 자체의 발견, 바로 인간이 알 수 있는 자연에 일반적인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닐지 싶다. 이 새로운 유형의 지식을 확립한 것으로 가장 많이 인정받는 그리스인은 기원전 600년경에 살았던 밀레투스의 탈레스이다. 탈레스는 ‘만물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 만물이 물에서 진화했다는 그의 결론은 현대 지식에 비추어 볼 때 가장 부적절한 결론이었다. 그런데도 탈레스는 물질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조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물질의 문제는 현대 물리학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탈레스가 추상 기하학을 발명하거나 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인과 이집트인은 평면이나 불규칙한 도형을 측량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고, 원통형 물체의 부피도 계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이러한 다양한 형태를 '세 개의 각이 있는 도형' 또는 '원통 모양의 돌'로 생각했을 뿐, 삼각형이나 원통형같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삼각형 땅의 변들 사이의 관계는 잘 알고 있었지만, 삼각형의 일반적인 성질은 전혀 알지 못했다. 탈레스와 당대의 몇몇 사람들이 구체적인 물체와 관련 없이 추상적으로 선, 각도, 곡면, 입체의 관계와 성질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탈레스였다. 그리스의 기하학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여 유클리드는 기원전 300년경에 고전적인 기하학을 저술할 수 있었다.

 

그리스 과학자는 다른 분야에서도 중요한 지식을 많이 만들었으며, 그들의 물리학 연구는 미래 과학의 성장에 기초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384~322)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으며, 그의 연구는 2천 년 동안 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고대에는 그리스 자연과학을 공학에 적용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사실 19세기 후반까지 과학이 공학에 공헌한 것보다 공학이 과학에 공헌한 바가 훨씬 컸다. 다시 말해, 과학 지식이 엔지니어에게 일반적으로 유용할 만큼 충분히 발전하기까지 2500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이 자연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시작했을 때 이미 최소 2500년 동안 공학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축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연과학이 공학에 적용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엔지니어는 새로운 기하학이 발전하기 시작하자마자 이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기하학을 주로 사용한 분야는 바로 건축 공학이었다.

 

Akropolis by Leo von Klenze.jpg

낭만적으로 묘사된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의 복원화. 레오 판 클렌제, 1846년작.

 

그리스인은 또한 자신을 문화 수준이 낮고 열등하며 야만인이라고 경멸하는 세상을 반대로 경멸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성취감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스스로 잘 알고 자랑스러워했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 무엇이고, 어디서 많이 배웠는지,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했는지 충분히 인식할 만큼 현실적이었다. 건축 분야에서 그들은 창조자라기보다는 숙련된 적응자였다. 그들의 혁신은 미케네, 미노아, 이집트 모델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미 검증된 기본 사항을 전문적으로 보존했다. 예술가의 공헌, 비례감각, 아름다운 것의 이해가 바로 그리스인일 것이었다.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아이디어나 형태에 대한 실험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 신전은 본질적으로 미케네 시대 이전의 목조 및 석조 건물을 돌로 재현한 것이지만 건축적 효과의 차이는 놀라울 정도이다.

 

이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사람은 우리가 정의하는 '엔지니어'로 정확히 번역할 수 있는 이름이 없었다. 그리스 건축가는 주로 공공건물의 건설을 담당한 기술자이지만, 종종 설계자이기도 했다. 그가 지은 건물로 그를 평가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독창성을 가진 사람으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건축가는 오늘날의 많은 엔지니어와 마찬가지로 계약 제도에 따라 일했다. 기원전 5세기의 도시 국가는 새로운 건물을 짓고자 할 때 장인, 석공, 조각가를 고용했고, 이들은 장인으로서 조수, 수습생, 고용인을 데려왔다. 이 계약자는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지만 국가에 대한 책임이 있는 건축가의 감독 아래에서 고용인들과 함께 일했다. 물론 여러 등급의 급여 차이가 있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건축가는 일반 석공보다 약 3분의 1을 더 받았다.

 

 

계약서는 보통 돌에 새겨 현장에 비치했다. 여기에는 인부를 안내하고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세부적인 사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세부 사항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지만, 아테네 항구인 피레우스에 있는 해군 무기고 유적지보다 더 잘 보존된 곳은 없다. 이 무기고는 기원전 4세기에 필론의 지시에 따라 길이 약 400피트, 폭 55피트, 높이 약 40피트의 구조물로 지어졌다. 필론의 설계도는 모뎀 형식으로 인쇄된 4페이지 분량이다. 일반적인 치수를 설명하고 벽의 두께, 특정 돌의 크기, 창문의 너비와 높이와 같은 중요한 치수를 고정했다. 오늘날 우리가 청사진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세부 사항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건축가와 그의 장인들은 그런 종류의 정보 대부분을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했다.

 

그리스 엔지니어는 전문 기술 학교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의 시대는 실험실이나 강의실에서 기술 교육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그런 방식으로 기술을 배웠던 사람들 밑에서 힘든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우며 일했다. 그가 오늘날의 엔지니어보다 작업의 예술성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의 코가 수많은 청사진과 명세서에 갇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인은 그만큼 예술가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의 비례감각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리스 건축가는 예술가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종종 대중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가인 익티누스와 칼리크라테스는 아테네 최고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가 그와 함께 모여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던 철학자, 예술가, 정치가 모임에 포함되었다.

 

Parthenon from west

파르테논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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