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향살이가 고향에서 산 세월을 앞질렀다.
대학 때 짐을 싸들고 나온 이후 돌아보니 어느새 타향이 더 익숙한 땅이 되어버렸다. 이제 외국 생활까지 하게 되니 고향은 더더욱 아련해진다. 어릴 적, 고향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던 어른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비로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 것 같다. 고향은 돌아갈 수 없을수록, 그리고 멀리 있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장소인가 보다.
내 기억의 고향은 충청북도 충주시 목행동이다.

목행동, 그리고 비료공장
1980년 국민학교에 입학했으니, 목행동에서의 기억은 그 이전, 즉 1970년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금가면 출신이고, 어머니는 목행동 건너편 동량 출신이니, 그 둘이 만나 목행동에 터를 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시절 목행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충주비료공장이다. 당시 사람들이 '충비', '1비'라 불렀던 그곳. 아버지도 그곳에 다녔다.
충주비료공장의 탄생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결절점과 맞닿아 있다. 1950년대 비료는 단일 품목으로는 최대의 수입품이었다. 비료의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자립 경제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이승만 정부는 비료 공장 건설을 추진했고, 미국의 대외활동본부(FOA)의 승인을 받아 1954년 연 8만 5천 톤의 요소 비료 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한국에 건설하기로 하였다. 이후 미국 측이 선정한 건설사 MHC(MacGrow and Hydrocarbon Co.)와 1955년에 건설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시공사와의 분규로 공사가 1년 7개월이나 지연되었고, 1959년 10월에야 공장이 완공되어 시운전에 들어갔다. 여러 문제를 거쳐 1960년 2월 비료 생산이 가능해졌고, 1961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되었다.
22만 평 부지 위에 수만 평의 건물과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당시로서는 최신식 공장이었다. 화학 비료가 없던 시절 퇴비에 의존하던 농민들은 충주비료공장의 등장으로 비료를 넉넉히 공급받게 되었고, 점차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단순한 공장 하나가 아니라, 전후 피폐해진 나라가 스스로를 먹여살리기 위해 세운 거대한 희망의 구조물이었던 것이다.
충주비료공장은 인천판유리, 문경시멘트와 함께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경제원조로 시작된 3대 산업 중 하나였으며, 식량 증산에 필수적인 요소비료 대량생산 능력을 갖춘 당시 최첨단 산업 현장이었다. 괴산발전소, 문경 시멘트 공장과 연계한 산업 시찰 코스로 지정되어 매일 수백 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대표 산업체이기도 했다.
미국식 타운하우스와 충비사택
공장 건립 당시, 미국인 엔지니어들이 머물 주거 공간이 필요했다. 당시 목행동은 여전히 농촌 마을에 가까웠다. 주민들이 '목행리'라 부를 만큼 소박한 동네였다. 그런 곳에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미국식 타운하우스가 들어섰다. 기술 전수와 공장 운영을 위해 상주한 미국인 엔지니어들을 위한 사택, 이것이 훗날 '충비사택'의 시작이었다.

미국인들이 떠난 후 한국인 직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나 1983년 비료 수요량 감소와 국제 비료 가격 하락의 영향으로 충주비료공장은 폐쇄되었다. 이후 공장과 사택은 새한미디어에 매각되었고, 새한그룹 해체 뒤 채권단 관리를 거쳐 코스모 그룹에 인수되어 현재에 이른다. 사택의 대부분은 이제 빈집으로 남아 있거나, 개발을 앞두고 있다.
10여 년 전 찾아갔을 때도 자물쇠가 채워진 채 들어갈 수 없었다. 어릴 적 뛰어놀던 그 공간은 이제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우리 가족은 사택에 살지는 않았지만 부모님 고향이 그 인근이라 자주 드나들었다. 1979년에는 목행동 천주교회 상지유치원을 다녔는데, 유치원 선생님이 사택에 방 한 칸을 빌려 살고 있었다. 유치원 졸업 무렵, 엄마 손을 잡고 선생님 댁에 놀러갔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 목행동의 풍경 — 철도, 비행장, 그리고 영빈관
지금 돌이켜보면 충비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었다. 공장 안에 자체 철도가 있었고, 심지어 비행장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행사 때마다 자주 방문할 만큼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시설이었으니, 귀빈을 맞이하는 '영빈관'이 있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 덕에 공장 안에서 인차기차(人車機車)를 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당시로서는 낯선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영빈관이 나의 오래된 미스터리를 풀어주는 열쇠였다.
돈까스의 기억 — 가난한 시절의 작은 사치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아마 여섯 살이나 일곱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돈까스를 먹은 기억이 있다. 고기 튀김 앞에 빵이 먼저 나오고, 스프도 나왔다. 정확히는 '스프'라기보다 '수프'에 가까웠던, 아마 크림 스프였을 그 음식. 그 희미한 기억이 수십 년 동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 엄혹하던 시절에, 어린 내가 어떻게 돈까스를 먹을 수 있었을까.
사실 당시 돈까스는 결코 가벼운 음식이 아니었다. 한국이 최빈국이던 1960년대 무렵까지 돈까스는 부유층이나 외국인들이나 맛볼 수 있을 정도의 고급 요리였으며, 경제 성장이 시작된 뒤에도 1970~80년대에는 생일이나 졸업식, 데이트 같은 특별한 날에만 즐기는 외식 메뉴였다.
경양식집에서 주문을 하면 "크림 스프로 하시겠습니까, 야채 스프로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은 뒤, 빵으로 할지 밥으로 할지를 다시 물었다. 빵을 고르면 모닝빵과 잼이 나왔다. 나의 기억 속 그 수프와 빵이 바로 이 경양식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먹은 것은 흔한 경양식 식당이 아니었다. 바로 충비 영빈관이었다. 국가 원수와 고위 인사들을 위한 공간에서 제공되던 서양식 코스 요리. 아버지의 직장 덕분에 나는 그 특별한 공간에서 생애 처음으로 경양식 돈까스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 시절 영빈관의 돈까스는 지금 흔히 접하는 일본식 돈까스와는 달랐다. 경양식집의 돈가스는 포크 커틀릿의 조리법을 따라 얇게 두드려 튀겨졌고, 여기에 밥을 곁들이고 김치도 제공하면서 한국식 돈가스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유럽의 커틀릿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건너오며 독자적인 형태로 자리 잡은 음식, 그것이 내 어린 시절의 돈까스였다.

기억이 의미하는 것
한 아이의 흐릿한 맛의 기억이 알고 보니 대한민국 산업화의 한 장면이었다. 미국의 원조로 세워진 공장, 그 공장을 짓고 운영하기 위해 들어온 외국 엔지니어들, 그들을 위해 지어진 타운하우스와 영빈관, 그리고 그 영빈관에서 제공된 경양식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선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1970년대 충주 목행동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장소에서, 전후 한국의 산업화와 미국 문화의 유입이 만들어낸 아주 낯선 음식 하나를 맛보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흐릿했던 기억이 선명한 역사와 맞닿는 순간,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자리를 발견하는 일. 고향이 그리운 것은 단순히 어릴 적 살던 동네가 그립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의 나, 그리고 그 시절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이 그리운 것이다.
목행동의 봄은 어땠을까. 지금도 남아 있을 그 골목의 돌 하나, 사택 담벼락의 냄새, 그리고 그날의 크림 수프 한 숟가락. 먼 외국 땅에서, 나는 그것들을 생각한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충주비료공장 항목), 충청북도인터넷신문 충북인뉴스, 나무위키(경양식·돈가스 항목), 위키백과(한국종합화학공업), 국가기록원 오늘의 기록(19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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