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국내여행

지리산 둘레길 3구간 — 인월에서 금계까지, 그리고 길이 가르쳐 준 것들

by 도서관경비원 2026. 4. 14.
반응형

2019년 5월의 기억, 6년이 지난 오늘 다시 꺼내다

 

타지에서 살다 보면 문득 고향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정확히는 한국이 그리워진다. 어느 날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그 사진들을 발견했다. 2019년 5월,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을 걸었던 날들의 기록이었다. 벌써 6년이 흘렀다.

둘레길 여행은 언제나 작은 걱정으로 시작된다. 시작점에 차를 세워두고 하루, 혹은 이틀을 걷고 나서 어떻게 돌아올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다. 둘레길은 원점 회귀가 아니라 한 방향으로 쭉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여행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발을 앞으로만 내딛어야 하니까.


이 구간은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약 20.5km의 길이다. 지리산의 주능선을 조망하며 다랑이논과 산촌 마을을 지나 엄천강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제방길, 농로, 차도, 임도, 숲길 등이 전 구간에 골고루 섞여 있다.

지리산 둘레길 여러 구간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이유는 아마도 지리산 주변의 다채로운 모습을 한꺼번에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방을 걷고, 마을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는 이 길에서는 한국의 자연과 삶이 층층이 쌓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건강한 성인 걸음으로 7~8시간 정도 필요한 코스이니, 몸도 마음도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주요 경로를 따라가면 이렇다. 구인월교에서 출발해 제방길, 농로, 차도, 숲길 등을 지나 금계마을에 이른다. 중간에 천왕봉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장항마을 당산 소나무, 만수천 옆 흰 너럭바위들과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진 매동마을, 그리고 다랑이논과 장작담 옆으로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줄지어 선 창원마을을 차례로 지나게 된다.

처음 시작하는 길이 쭉 뻗어 있었다. 어릴 때는 내가 살아가는 인생도 저 길처럼 곧게 뻗어 있을 줄만 알았다. 막상 살아보니 굽이굽이 오르락내리락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하는데, 정말 길만 한 비유가 없다. 내가 걷는 이 둘레길도 그렇다. 평탄한 제방길로 시작해서 어느 순간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 마을이 나타나고, 또 고개가 나타나고. 그것이 이 길이고, 삶이다.


한국의 5월은 특별하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투명하며, 온 산이 초록으로 물든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달답게, 들판에서 뛰어놀아도, 어르신이 산책을 해도 모두 그림이 되는 계절이다. 그 5월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행운이었다.


물을 댄 논에 비친 나무들이 멋졌다. 외국에 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산과 나무와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진짜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가까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 그것이 사실은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둘레길 중간에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시설들을 보면 가끔 답답함이 밀려온다. 길을 알리고 싶은 마음, 쉬어가라는 배려는 이해하지만, 자연 속에 플라스틱과 콘크리트를 그냥 박아 넣은 것들은 마음에 걸린다. 자연에 가까운 재료로, 비가 오면 씻겨 내려가도 괜찮을 것들로 만들어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환경을 보는 눈이 행정에도 필요하다.


둘레길 중간중간에 만나는 작은 마을이 반갑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마을이 어쩜 저렇게 주변 환경과 어울리게 자리 잡고 있는지. 마을 뒤로 산을 오르면 내려다보이는 마을 풍경이 또 아름답다. 기와집 지붕선들이 산의 능선과 어우러지는 그 모습은 수백 년에 걸쳐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산을 등지고 마을을 세우는 것은 우리만의 방식이 아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사람들은 바람을 막아주는 산을 뒤에 두고 살아왔다. 그것이 삶의 지혜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풍경 한켠에 불쑥 솟아있는 아파트가 눈에 밟혔다. 공무원들이 허가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한 번만 더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으면 어땠을까.


힘든 산을 다 넘고 나서 만나는 카페가 있었다. 이름이 '히말라야'였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차린 곳임을 이름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맥주 한 캔. 다시 걸어야 할 길이 남아 있어도 마시고 싶을 땐 마셔야 한다. 카페가 자연스럽다는 것, 그 말의 의미가 그 순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KBS '1박 2일'에도 소개된 곳이었다. 오래된 가옥에서 밥을 먹고, 새로 지은 가옥에서 잠을 잤다. 저녁 밥상에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함께 앉았다. 은퇴 후 부부가 함께 걷는 분, 혼자 묵묵히 걷는 분.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착하다. 나쁜 사람은 이런 길을 걸을 리가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었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길로 오셨다고 했다. 왜 하필 3구간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하셨다. 이 길을 걷다가 마음이 드는 곳을 찾으면 그곳에 자리를 잡겠다고 하셨다. 그 말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지금쯤 그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계실 것이다. 바라건대, 가족의 걱정은 기우가 됐으면 좋겠다.

아침 밥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서면 '퇴수정'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개울 옆, 오래된 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은 그 정자는 그 옛날 양반들이 시조를 읊으며 노닐던 곳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어느 여름날,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물속으로 뛰어들며 놀았을 것이다. 그 두 장면이 모두 어울리는 곳이었다.


한옥은 정말 아름답다.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맞물려 세워진 기둥과 보, 자연과 같은 색을 가진 나무와 돌과 흙. 녹도 슬지 않고, 세월이 지나도 풍경 속에서 자연스럽다. 하루 종일 그 마루에 앉아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 나선형으로 완만하게 돌아 내려갔다. 급하지 않게, 서두르지 않게,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그 길에서 또 한 번 인생을 배웠다. 꼭 가파르게 직선으로 내려와야만 빠른 것이 아니다.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 더 안전하고, 더 아름답고, 더 오래갈 수 있다.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은 단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니다. 굽어진 둘레길은 심한 언덕이나 비탈도 없이 온화한 시골길 그대로이고, 지리산 자락과 마을 풍경에 한눈을 팔며 걸어도 몸과 마음이 절로 힐링된다. 하지만 그 길이 주는 것은 힐링만이 아니다. 평탄한 길, 오르막, 내리막, 그리고 다시 마을.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되고,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카페 안녕


6년 전 그 길 위에 서 있던 나는,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줄 알았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또 걷고 싶다. 그 굽이굽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길 위에서, 오늘의 나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인월 ~ 금계) 기본 정보 전북 남원시 인월면 → 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 | 총 거리 약 20.5km | 소요 시간 7~8시간 | 문의: 인월안내센터 063-635-085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