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카 (2021)
어느 순간부터 영화는 더 이상 ‘경험’이 아니라 ‘소비’가 되었다.
OTT는 무한한 선택지를 내밀지만, 그 풍요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결핍을 느낀다. 선택의 자유가 과잉이 되면, 선택의 의지는 무력해진다. 영화를 고른다는 행위는 사라지고,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목록 앞에서 우리는 그저 스크롤을 내리는 존재가 된다. 이때 영화는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나는 그저 흘러가는 콘텐츠의 흐름 속에 잠시 머무를 뿐이다.
그런 시대에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마치 시간의 속도를 되묻는 철학적 질문처럼 다가온다. 이 영화는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상처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그 상처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는지를 보여준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나누는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인정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이해’가 아니라 ‘수용’하게 된다. 체홉의 바냐 아저씨가 이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체홉의 세계는 구원도, 극적인 변화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비극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 즉 ‘지속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이 문장은 체념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는 조용한 용기다. 철학자 레비나스가 말했듯, 인간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 비로소 윤리적 존재가 된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는 순간, 그들은 서로에게 ‘얼굴’이 된다. 그 만남은 치유가 아니라 책임의 탄생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두 사람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눈 덮인 고향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그들은 과거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함께 견딜 수 있는 관계를 발견한다. 그들은 고통을 제거하는 대신 고통의 자리를 재배치한다. 삶은 여전히 무겁지만, 그 무게를 나누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OTT 시대의 빠른 소비 속에서 이 영화가 유독 오래 남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당신은 정말 영화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흘러가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삶은 여전히 고통스럽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고.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체홉의 말처럼, 언젠가 우리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날을 향해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이미 인간의 품위이자 희망일지 모른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수어로 하는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모든 걸 말해 준다.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영화에 안 나오는 대사>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우린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온통 보석을 뿌려 놓은 듯한 하늘을 보게 될 거예요.
세상의 모든 악과, 우리의 모든 고통이
온 세상에 가득 찬 용서 속에서 어떻게 사라지는지 보게 될 거예요.
우리 삶은 마치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시듯
조용하고, 우아하고, 달콤한 것이 될 거예요.
저는 믿어요, 아저씨.
저는 믿어요. 가엾은 우리 바냐 아저씨,
우시는 군요… 아저씨는 한평생 기쁨이란걸 모르셨지요.
하지만 이제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저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곧,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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