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모건 하우절의《돈의 심리학》에서 미국 소비의 역사를 갈무리한 내용이다. 현재 우리의 상황과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드디어 끝났다.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항복을 '미국 역사상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 '역사란 지독한 것 다음에 또 지독한 게 오는 법이다.' 종전의 기쁨은 금세 다음과 같은 질문에 부딪혔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미국 인구의 11%였던 1,600만 명이 전쟁에 동원됐다. 마지막에는 800만 명이 해외에 있었고, 그들의 평균 연령은 23세에 불과했다. 18개월만 지나면 150만 명을 제외한 그들 모두가 미국으로 돌아와 제복을 벗는 것이다. 그다음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하게 되는가? 그들은 어디서 일하는가? 그들은 어디에 사는가?
이런 게 당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된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아무도 답을 몰랐다. 둘째, 빨리 답을 찾지 못했을 때 (많은 경제학자가 보기에) 가장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는 경제가 다시 대공황 같은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이었다.
기나긴 전쟁을 겪으면서 세 가지 다른 힘이 축적되었다.
첫 번째, 주택 건설이 멈춰 섰다. 그간 모든 생산 능력은 전쟁물자 공급 쪽으로 이동했다. 1943년에는 매달 1만 2천호 이하의 주택이 건설되었는데, 이건 미국 도시 하나당 새로 지어진 주택이 한 채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귀환 용사는 심각한 주택난에 빠졌다.
두 번째, 전쟁 중에 만들어진 특정 직업들이 전쟁이 끝나자 갑자기 필요 없어졌다. 예컨대 선박이나 탱크, 비행기를 만드는 직업 등이다. 민간 기업은 급속도로 대량 실업이 이어졌다. 돌아온 군인들이 어디서 일할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았다.
세 번째, 전쟁 중에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결혼율이 급증했다. 군인들은 다시 엄마 집의 지하실로 귀환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당장,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자기 집을 구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정치가들은 바로 이 점이 걱정되었다. 불과 5년 전에 끝난 대공황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1946년 경제자문위원회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내놓은 보고서에는 “향후 1년에서 4년 안에 대규모 경제 공황이 찾아올 수 있다.”라는 경고가 적혀 있었다. 이들은 별도의 1947년 보고서에 트루먼 대통령이 참석했던 회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어떤 경기침체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경기침체를 유발하는 힘이 손을 전혀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지는 않을지 상황 파악을 아주 정확하게 해야 한다. (중략) 더 이상의 하락은 공황으로 가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을 증가시키는 여러 전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공포가 더욱 심해진 건 바로 수출 증대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가장 큰 두 경제권, 바로 유럽과 일본이 폐허 위에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빚에 허덕여서 정부가 경제에 직접 자극을 주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렇게 조치했다.
이제 저금리가 유지되었고, 소비자 신용 시대가 열렸다.
전후 경제가 침몰하는 걸 막으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낮은 금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면 옷부터 자동차까지 온갖 물자가 부족하고, 잠시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51년 전까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정치적으로 독립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통령과 이사회는 정책 협조를 이룰 수 있었다. 1942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전쟁 비용 마련을 돕기 위해 단기금리를 0.38%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7년간 금리는 0.01%도 바뀌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까지 3개월 국채 이익률은 2% 미만에 머물렀다. 금리를 낮게 유지한 이유는 6조 달러에 이르는 전쟁에 사용한 비용을 낮게 유지하려는 거였다. 하지만 저금리는 귀환 용사에게 또 하나의 역할을 해 주었다. 주택과 자동차, 장비, 물건 등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정말 싸게 빌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극도로 긴장한 정치가의 시각에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소비는 노골적인 경제 전략이었다.
전쟁 자금을 대려고 절약과 저축을 권장하던 시대는 금세 소비와 지출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프린스턴 대학교 역사학자 셸던 개런은 아래와 다음 같이 쓰고 있다. "1945년 이후 다시 미국은 저축을 홍보하던 유럽 및 동아시아의 유형과 다른 길을 갔다. (중략) 정치가, 사업가, 노동조합 모두 경제 성장을 견인하려고 미국인에게 소비와 지출을 권장했다."
여기서 두 가지가 소비와 지출을 권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하나는 유례없는 주택담보대출 기회를 제공한 〈제대군인 원호법〉이었다. 1,600만 명의 참전 용사는 계약금 한 푼 없이, 첫해 이자도 없이 집을 살 수 있었다. 고정금리가 어찌나 낮은지 매달 대출상환금이 주택 임차비보다 낮았다.
다른 하나는 대공황 시절 규제 완화로 소비자의 신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950년에 최초의 신용카드가 도입됐다. 백화점 카드, 신용 할부, 신용 대출, 소액 대출 등등 온갖 여신이 유행했다. 그리고 당시에 신용카드를 비롯해 모든 채무 이자가 세금 공제를 받았다.
정말 달콤했다. 그래서 과식했다.
1950년대 가계부채는 2000년대 부채보다 1.5배나 빠르게 성장했다. 수요는 폭발했고, 값싼 소비자 신용으로 경제 호황이 도래했다.
1930년대는 미국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10년이었다. 그런데 20년이 걸려서야 눈치챘지만 희망이 하나 있기는 했다. 대공황은 필요한 자원과 생산성, 혁신을 크게 늘려 놓았다. 1930년대는 생산성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들 경제가 얼마나 나쁜지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1940년대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모든 게 전쟁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50년대가 되자 갑자기 깨달았다. ‘와, 놀라운 발명품들이 나왔구나. 우리가 그런 걸 정말 잘 만드는구나.’ 그건 바로 가전제품, 자동차, 전화기, 에어컨, 전기 등이었다. 전쟁 기간에 수많은 가정용 제품을 구매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건 공장은 모두 총과 배를 만드는 곳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은 억눌린 수요를 만들어냈다. 결혼했고, 다시 삶을 이어 나가고 싶었다. 새로 생긴 값싼 '소비자 신용'으로 간덩이가 커진 이들은 미국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과소비를 이어갔다.
프레더릭 루이스 앨런은 《커다란 변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전후 기간에 농부는 새 트랙터와 옥수수 수확기, 전기 착유기를 샀다. 이웃과 같이 쓰려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농기계를 사 모았다. 농부의 아내는 늘 갖고 싶었지만 대공황기에 여유가 되지 않아 사지 못했던 반짝이는 흰색 냉장고와 최신 세탁기, 급속 냉동기를 샀다. 교외 가정은 모두 식기 세척기를 설치하고, 전동 잔디깎이도 샀다. 도시 가정은 세탁소를 이용하고 거실에 놓을 텔레비전도 샀다. 남편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설치됐다. 이런 식의 소비가 끝이 없었다.”
소비 열풍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겠는가?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상업용 자동차와 트럭 제조는 사실상 멈춰 있었다. 그러다가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 2,100만 대의 자동차가 팔렸다. 1955년까지 3,700만 대가 더 팔렸다.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지어진 주택은 200만 호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700만 호가 지어졌고, 1955년까지는 다시 800만 호가 더 지어졌다.
물건에 대한 억눌린 수요에,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능력까지 생기면서 귀환 병사들은 다시 일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일자리였다. 여기에 소비자 신용이 더해지면서 미국의 소비 여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51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50년까지 총 소비자 지출과 주택 건설을 합하면 약 2,030억 달러에 이르며 이건 1944년보다 40% 증가한 수치이다.”
'이 많은 군인이 전쟁 후에 뭘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그들은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일로 벌어들인 돈과 값싸게 빌려주는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살 예정이었다.
하지만 부가 그 어느 때보다 평등하게 공유되었다.
1950년대 경제의 중요한 특징은 가난한 사람을 덜 가난하게 만들면서 나라가 부유해진 것이다. 평균 임금은 1940년에서 1948년 사이 두 배가 됐고, 1963년까지 다시 두 배가 됐다. 이렇게 늘어난 임금은 이전 수십 년간 뒤처졌던 사람들에게 집중됐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이례적일 만큼 좁혀졌다.
루이스 앨런은 1955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앞서가던 부유한 이들과 격차가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집단 단위로 보았을 때 가장 선전한 것은 산업 노동자였다. 예컨대 이전에는 2,500달러로 살던 철강 노동자 가족은 이제 4,500달러를 받았고, 이전에 3,000달러를 받던 고숙련 기계공 가족은 이제 연간 5,500달러 이상 쓸 수 있다."
대략 1만 6,000달러 이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최상위 1%, 즉, 정말 잘살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세후 총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45년까지 13%에서 7%로 내려왔다. 이건 단기적인 경향이 아니었다. 195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임금 노동자 하위 20%의 실질 소득은 상위 5%와 거의 똑같은 양만큼 늘어났다. 평등은 임금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직장을 갖는 여성 수가 기록적으로 늘어났다. 여성의 노동 참가율은 전후 31%에서 1955년 37%, 1965년 40%까지 증가했다. 소수집단도 혜택을 보았다.
1945년 취임식 이후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는 어느 흑인 기자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썼다.
“12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1933년 환영 파티에 오늘처럼 유색인종이 섞여 있었다면 온 나라 신문에 보도가 되었겠지요. 지금은 그게 뉴스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아무도 언급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여성과 소수집단의 권리는 오늘날에 비하면 여전히 형편없었다. 하지만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진행된 평등을 향한 진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계층의 평등은 생활양식의 평준화를 의미했다. 보통 사람은 쉐보레를 몰고, 부유한 사람은 캐딜락을 몰았다. TV와 라디오는 계층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즐기는 엔터테인먼트와 문화를 평준화했다. 우편 주문 카탈로그는 사는 지역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입는 옷과 사는 물건을 평준화했다.
1957년 〈하퍼스 매거진>은 다음과 같이 썼다.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같은 담배를 피우고, 같은 면도기로 면도하고, 같은 종류의 전화기와 진공청소기, 라디오, TV를 사용하며 집에는 같은 종류의 조명과 난방 설비를 갖추고 있다. 구매 목록은 끝이 없다. 부자의 자동차와 가난한 이의 자동차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사실상 비슷한 엔진에 비슷한 부품을 쓰고 있다. 1900년대 초에는 자동차에 서열이 있었다.>
2016년에 프로그래머이자 벤처기업 투자가인 폴 그레이엄은 당시 TV 방송국이 세 개밖에 없다는 간단한 사실이 문화 평준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밤마다 수백만 가구가 이웃과 같은 시간에 TV 앞에 앉아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지금 슈퍼볼 경기 때 일어나는 일이 매일 저녁 일어났다. 우리는 말 그대로 동기화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핵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변 사람과 비교한다. 1945년에서 1980년 사이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이웃 사람과 평등하거나, 적어도 주변 사람이 가늠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사람의 삶이 소득만큼이나 평등했다는 점은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으로,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하지만 부채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그렇지만 소득도 많이 증가해서 충격은 별로 크지 않았다. 1947년에서 1957년 사이 가계부채는 다섯 배나 늘었다. 새로운 소비문화와 대출 상품, 정부 보조금, 연방준비제도가 낮게 유지한 금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기간 소득이 워낙 많이 증가했기 때문에 가계에 미친 영향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전후 가계부채가 워낙 낮은 상태였다. 대공황이 가계부채의 많은 부분을 없애버렸고, 전쟁 기간에 가계지출이 워낙 줄어 있어서 누적 부채는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1947년에서 1957년 사이 가계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오늘날 가계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100%를 넘는다.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에는 이 비율이 계속 상승해도 60% 이하였다. 이런 부채 붐을 주도한 건 바로 주택 소유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1900년에 주택 소유율은 47%였다. 이후 40년간 비슷한 수준이었다가 1945년에는 53%, 1970년에는 62%가 되었다. 이제는 인구의 높은 비율이 이전 세대는 이용할 수 없었던 부채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그 점에 불만이 없었다.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1950년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별로 자신이 있었다. 더 힘든 시기에 성장한 사람이 보기에는 충격적일 정도였다. 이들은 부모만큼 빚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략) 이들은 소득이나 소유 측면만이 아니라 미래가 이미 도착했다고 믿는 점에서 부모들과 달랐다. 가족 최초로 집을 소유한 이들은 흥분과 자부심을 느꼈고 가게로 가서 가구와 가전제품을 샀다. 다른 때라면 젊은 부부가 첫 자녀의 옷을 살 때나 보였을 법한 감정을 내비쳤다. 집을 샀다는 성취감이 너무나 큰 나머지 그 집에 넣을 물건이라면 못 살 것이 없어 보였다.>
이제 점점 중요해지는 몇 가지를 서로 연결할 차례다.
미국은 호황이었다. 유례없이 ‘다 함께’ 호황이었다. 부채를 통한 호황이 당시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부채는 여전히 소득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었고, 부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점점 균열이 시작되었다.
경제가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는 게 비로소 분명해진 건 1973년부터였다. 이 해에 시작된 경기침체는 193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실업률을 몰고 왔다. 물가가 폭증했다. 하지만 전후와 달리 높은 수준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1973년에는 단기금리가 8%를 찍었다. 10년 전보다 2.5%나 오른 수치였다. 이 모든 건 베트남 전쟁, 폭동, 마틴 루서 킹과 존 F.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속에서 자리 잡은 공포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암울했다.
전후 20년간 미국은 세계 경제를 지배했다. 여러 유럽 강대국의 제조 설비가 폭격으로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이 호황이었다. 중국 경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중동은 산유국으로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미국은 운 좋게도 경제적 이점을 누리며 ‘위대한 세대’로서 같은 문화를 공유했지만(그리고 대공황을 통해 단단해지고 전쟁을 겪으며 체계적 협력이 자리 잡았다), 베이비붐 세대가 성인기에 도달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새로운 세대는 무엇이 정상인지 이전 세대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지난 20년간 지속된 경제 순풍은 끝나고 있었다.
금융에 관한 모든 건 기대치라는 맥락 안에 있는 자료다. 경제라는 바람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불기 시작했을 때 20세기의 가장 큰 변화 중에서 하나가 일어났지만, 사람들의 기대치는 아직도 전후 평등 문화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반드시 소득의 평등을 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도 포함되었고, 생활양식과 소비 기대치의 평등에 관한 생각이 있었다. 50번째 백분위수의 소득을 버는 사람이 사는 삶은 80번째 또는 90번째 백분위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99번째 백분위수의 소득을 버는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만, 50번째 백분위수의 소득을 버는 사람이 여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이어야 했다. 1945년에서 1980년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은 그런 식으로 움직였다. 당신이 이걸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르다고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기대치는 언제나 현실보다 느리게 움직인다. 197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경제 성장은 지속되었지만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삶이 주변 사람과 비슷해야 한다는 사람의 기대치는 바뀌지 않았다. 다시 호황이 시작되었지만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의 아침’ 광고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국에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날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남녀가 일을 하러 갈 것입니다. 금리는 1980년 최고치의 절반가량에 불과하고 2,000가구에 가까운 가족이 새집을 살 것입니다. 이건 지난 4년간 그 어떤 때보다 많은 수치입니다. 이날 오후 6,500명의 젊은 남녀가 결혼할 것입니다. 물가상승률이 불과 4년 전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지금, 이들은 자신 있게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과장이 아니었다. GDP 성장이 1950년대 이후 최고치였다. 1989년이 되자 미국의 실업자는 7년 전보다 600만 명이 줄었다. 1990년대 실질 GDP 성장률의 총합은 40%로, 42%였던 1950년대와 거의 맞먹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연두교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자랑했다.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지금, 우리에게 2,0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30년 만에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뤘고, 실업률은 30년 만에 가장 낮습니다. 빈곤율은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고, 흑인 및 라틴계 인구 실업률 또한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42년 만에 처음으로 2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고, 다음 달 미국은 역대 최장기간 경제 성장을 기록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경제를 건설했습니다.”
여기에서 마지막 문장이 중요하다. ‘새로운’ 경제였다.
1945년에서 1973년 사이 경제와 1982년에서 2000년 사이 경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성장의 크기는 동일했으나 전혀 다른 주머니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다음 수치를 이미 들어보았겠지만, 다시 언급할 가치가 있다. <애틀랜틱>은 다음과 같이 썼다.
1993년과 2012년 사이에 상위 1%의 소득은 86.1% 증가했으나, 하위 99%의 소득은 6.6% 증가하는 데 그쳤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2011년 이런 글을 남겼다.
지난 10년간 상위 1%의 소득은 18% 증가했으나, 중산층 소득은 실제로 하락했다. 고졸 남성의 소득 하락은 가팔랐다. 25년간 12%가 하락했다.
이건 전후 일어난 평준화와 정반대에 가깝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는 경제학의 가장 지독한 논쟁거리 중에 하나다. 이보다 더 심한 논쟁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뿐이다. 다행히 이 책의 목적을 위해서는 둘 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지난 35년간 극격한 불평등이 힘의 한 축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기간 미국인은 전후 경제에 문화적으로 뿌리내린 두 가지 생각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미국인과 비슷한 생활양식을 누려야 하고, 그 생활양식을 누리기 위해 빚을 내는 게 허용된다는 생각 말이다. ‘옆집에 뒤처지면 안 돼.’ 같은 현상이 무리한 소비와 대출로 이어졌다.
소수의 미국인은 소득이 증가하면서 파격적인 생활을 누리게 됐다. 더 큰 집,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비싼 학교를 가고, 근사한 휴가를 즐겼다. 다른 사람은 모두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광고업계가 부채질했고, 이후에는 인터넷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몇몇 부유한 미국인이 누리는 생활양식은 소득이 증가하지 않은 미국인들 다수의 열망을 부풀려놓았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생긴 ‘평등’ 문화, ‘함께’ 문화가 의도치 않게 ‘옆집에 뒤처지면 안 돼.’ 현상을 낳았다. 자, 이제 문제가 무엇인지 보일 것이다.
투자 은행가인 조는 1년에 90만 달러를 번다. 조는 4,000제곱피트의 집과 벤츠 두 대가 있고, 자녀 셋을 최고급 사립학교에 보낸다. 조는 그럴 능력이 된다. 하지만 피터는 은행 지점 매니저로 1년에 8만 달러를 번다. 피터는 조를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피터의 부모는 각자 직업이 다르다고 해도 미국인의 생활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었고, 자식에게도 같은 생각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피터 부모가 가진 생각은 소득 분배가 한 곳에 몰려 있던 그 시절에는 옳았다. 하지만 지금 피터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피터의 기대치는 부모님 시절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현실은 바뀌었는데 말이다. 그러면 피터는 어떻게 할까? 피터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대출받는다. 카드 빚이 4만 5,000달러다. 차 두 대를 리스한다. 자녀들은 엄청난 학자금대출 빚을 안고 졸업할 거다. 피터는 조가 누리는 삶을 살 형편이 안 된다. 그런데도 피터는 조와 똑같은 생활수준을 누리려고 무리한다. 엄청난 무리다. 1930년대 사람에게 이런 게 황당해 보이겠지만 전후 75년 동안 미국인은 가계 빚을 받아들이는 문화를 키워왔다.
평균 임금이 변하지 않는 동안 미국 신규 주택의 평균 가격은 50% 늘어났다. 미국의 평균 신규 주택은 이제 입주자 수보다 많은 욕실을 가지고 있다. 네 개 이상의 욕실을 가진 주택이 절반 가까이 된다. 1983년에는 18%였다.
1975년부터 2003년 사이에 물가상승률을 참작한 자동차 할부 대출 금액 평균은 1만 2,300달러에서 2만 7,900달러로 두 배 이상 뛰었다. 대학 등록금과 학자금대출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 것이다. 가계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1963년에서 1973년 사이까지 엇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던 게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서 1973년 60%이던 게 2007년에는 130%를 넘겼다.
1980년대 초부터 2020년까지 금리는 크게 하락했지만 소득 중 대출금 상환에 들어가는 돈의 비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소득이 낮은 사람일수록 이 비율은 더 높다. 부채 및 리스 상환에 쓰는 돈이 소득 최상위 집단은 소득의 8% 남짓이지만, 소득 순위 50번째 백분위 이하 사람은 21%가 넘는다.
지금의 부채 상승과 1950년대, 1960년대의 부채 상승 사이의 차이는 지금의 시작점이 훨씬 높다는 점이다.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는 부채 위기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내가 이자를 낼 수 있는 금액보다 더 큰 빚을 내는 순간이다.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는 마치 만화 캐릭터 와일 E. 코요테가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큰일 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과 같다."
바로 그런 일이 2008년에 일어났다. 패러다임은 한 번 자리 잡으면 돌리기가 너무 어렵다.
2008년 이후 많은 빚이 사라졌다. 그러다가 금리가 급락했다. 소득 대비 가계부채 상환 비율은 현재 3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2008년에 대한 대응은 (당시에는 필요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추세를 계속하게 했고, 결국 우리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양적완화는 경제 붕괴를 막았지만 자산 가격을 올려놓았다. 이건 자산 소유자들, 주로 부자들에게 좋은 일이었다. 2008년에 연방준비제도는 기업 부채를 지원했다. 이는 부채를 보유한 사람, 주로 부자에게 도움이 됐다. 지난 20년간 세금 감면 혜택은 거의 고소득층에게 돌아갔다. 고소득층은 자녀를 최고 대학에 보낸다. 그러면 그 자녀는 다시 고소득자가 되어 나중에 연방정부가 지원할 기업 부채에 투자할 수 있고, 다시 다양한 정부 정책 지원을 받을 주식을 소유할 수 있다. 이런 식이다.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그대로다. 하지만 이런 건 1980년대 초 이후 벌어진 더 큰 현상의 징후다. 경제가 일부 사람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하는 현상 말이다. 성공은 이제 과거같이 능력 중심이 아니다. 성공이 허락되는 사람은 이전보다 더 큰 이득을 보상받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이야기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번에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거고, 그래서 경제가 전후 형성된 사람의 기대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이다. ‘체계적 불평등 없이 폭넓은 중산층이 존재하고, 옆집이나 저 아랫동네 집이나 이웃은 나와 상당히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라는 기대 말이다.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나서도 이런 기대가 35년간이나 지속되는 이유는 뭘까. 이 기대가 충족되면 대단히 많은 사람이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기쁘고 좋은 일은 쉽게 놓기가 힘들다. 사람들은 아직 이 기대를 놓아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 기대를 다시 돌려받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만둬, 나에게 불리하잖아.”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티 파티 운동,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 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의 공통점이 있다. 각각 “그만 멈춰. 난 내리고 싶어.”라고 소리치는 집단을 대변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외치는 내용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이유는, 적어도 그 일부는 비슷하다. 상황이 모든 사람에게 엇비슷하게 작용해야 한다는 기대치에서 볼 때, 자신에게 불리한 게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부상을 소득 불평등하고만 연결하는 걸 비웃어도 좋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언제나 이런 건 복잡하고 문제가 겹겹이 쌓여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나는 내가 기대했던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아. 그래서 화가 나. 다 망해버리라고 해. 너도 망해버려! 나는 다른 걸 위해 싸울 거야. 왜냐하면 이건, 뭐가 됐든 간에, 잘못되어 가고 있으니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다가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케이블 뉴스의 힘이 더해진다고 생각해 보라.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다.
베네딕트 에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이 사람들을 더 많은 관점에 노출할수록 사람은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이건 경제적 의견의 다양성이 크지 않던 전후 경제와 비교했을 때 아주 큰 변화다. 당시에 실제 결과의 범위가 더 낮은 수준이기도 했고, 남들의 생각이나 생활을 보거나 알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경제학은 순환에 관한 이야기다. 오는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다.
현재 실업률은 수십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실제로 부자의 임금보다 저소득 노동자의 임금이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대학 등록금은 보조금이 지급되면서 대체로 증가세가 멈췄다. 영광의 1950년대 이후 의료, 통신, 교통, 기본권 등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안다면 아마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는 ‘기대치는 현실보다 느리게 움직인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후 35년간 경제가 바뀌는데도 1950년대에 형성된 기대에 집착했다. 그리고 오늘날 중산층의 호황이 시작됐다고 해도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 빼고는 다들 불리해.’라는 생각이 여전히 지속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건 뭔가 잘못됐어.’의 시대가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뭐가 됐든 근본적으로 새로운 게 지금 당장 필요해.’라는 시대도 계속될지 모른다. 어찌 보면 바로 이것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듯한 사건들이 촉발되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란 정말 지독한 것 다음에 또 지독한 것이 오는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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