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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문화

이역만리 서점에서 찾은 한 권의 책

by 도서관경비원 2026.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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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갤러리아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아부다비에 키노쿠니아(Kinokuniya)라는 서점이 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일본에서 시작한 서점으로, 미국, 싱가포르, 중동까지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린 책의 나무다.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이 도시에서, 갤러리아 몰 한편에 자리 잡은 그 서점은 언어와 국경을 초월한 이야기들을 조용히 품고 있다.


믿기지 않았던 그 이름

10월 10일, 노벨상 발표가 있던 날.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반신반의했다. 우리나라 소설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다니.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건 묘한 의구심이었다. 너무 오래, 너무 간절히 기다려온 소식이라 오히려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불과 몇 주 전, 이스탄불의 한 서점에서 오르한 파무크의 책들이 유리 너머 특별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책등이 아닌 표지가 정면을 향해 놓인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특별한 예우인지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튀르키예의 유일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그토록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는데, 단 2주 만에 우리에게도 처음으로 그 이름이 생겼다. 한강...


원어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

사실 그 책을 사러 간 건 읽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대표작을 원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번역의 필터 없이 작가의 언어와 온도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특권이다. 영어로 읽는 《Human Acts》도 데보라 스미스의 훌륭한 번역으로 빛나겠지만, 한국어로 쓰인 《소년이 온다》는 한국어로 읽혀야 제 빛을 발한다고 믿는다.
 
이역만리 사막의 나라에서 한국 소설 한 권을 손에 쥐는 것. 그 작은 행위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지, 그 서점의 계단을 오르기 전부터 이미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바퀴를 돌고서야

갤러리아 몰 안 키노쿠니아 서점은 1층과 2층으로 나뉜다. 당연히 1층에 무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노벨상 수상자를 맞이하는 특별 코너, 화려한 배너, 혹은 작은 안내판이라도. 하지만 1층에는 빠르게 재고를 소진하려는 할인 도서들만 쌓여 있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책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2층으로 올라갔다. 해리 포터의 세계와 일본 망가의 숲을 지나 Korean 문학 코너를 찾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노벨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바퀴를 돌았다. 그래도 없었다. 《채식주의자》도, 《소년이 온다》도, 《Human Acts》도.
 
결국 카운터로 향했다.
"I am looking for 2024 Nobel Prize, Human Acts."
 
직원은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메모지를 내밀었다. 최대한 또박또박, 예쁜 글씨로 썼다. Human Acts. 그 두 단어를 쓰는 순간, 괜히 손끝이 진지해졌다.


단 한 사람만 알고 있던 특별한 공간

직원이 나를 Korean 코너로 데려갔다. 이미 살펴본 곳이었다. 내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 직원이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졌다. 잠시 후 다른 직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내한 곳은, 벽 높은 곳에 마련된 작은 특별 공간이었다.

 
거기 있었다. 한강의 책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래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하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 공간은 고개를 들어 한참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면 절대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책을 사러 온 사람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주기엔 너무 높고, 너무 구석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10명이 넘는 직원들 중 단 한 사람만이 그 공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세계가 주목한 이름인데, 이 서점에서 그 이름은 벽 높이 숨겨진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2016년에 출판된, 딱 하나 남은

결국 손에 쥔 건 2016년에 출판된 《Human Acts》 영문판 한 권. 딱 하나 남아 있던 책이었다. 누군가 이미 가져간 자리에 홀로 남아 있던 마지막 한 권.
 
표지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1980년 5월의 광주가, 그 봄의 비명이 이 얇은 종이 사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게 새삼 무거웠다. 아부다비의 환한 형광등 아래, 한국에서 건너온 이야기를 손에 들고 서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벅찼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이름은 한 작가에게 수여되지만, 사실 그것은 그 언어로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이기도 하다. 오르한 파무크의 책이 이스탄불 서점 유리 너머에서 빛나던 것처럼, 언젠가 세계 어딘가의 서점에서 한강의 책이 표지를 정면으로 세운 채 당당히 놓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오늘은 이 한 권으로 충분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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