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기 「하얀 전쟁」이 다시 읽고 싶어 졌다. 예전에 분명히 샀을 텐데 책이 오래되어 종이색이 변하면서 아마도 버렸을 것이다. 다시 사려 했더니 예전에 두 권으로 나누어 다시 출판되었다가 이제는 절판되어 버렸다. 전자책도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중고서점에서 구매하였다.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은 이유는 다시 드리우는 세계 여러 곳에서의 전쟁의 그림자, 전후 세대의 잘못된 민주주의 인식, 내란의 종식 등 때문일 것이다. 이제 막 다시 읽으려는 참이다.
안정효 작가님은 장편소설 「하얀 전쟁」을 직접 영어로 개작하여 미국 소호 출판사에서 'White Badge'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을 출간하고 나서 바로 미국에서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뉴욕타임스》, 《LA타임즈》등 여러 신문에서는 수 차례에 걸쳐 이 책의 서평을 실었다.
1989년의 일이니 꽤 오래 전의 서평이다. 지금 읽으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지만, 1989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지 1년이 지났을 뿐이며, 아직 대한민국은 독재자가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큰 우방과 한국의 갈등
미국에 소설을 소개하는 나라로는 생소한 아시아의 한구석에서, 미국 문화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얘기를, 어쩌면 너무 많은 얘기를 하는 반가운 소설이 등장했다. 《하얀 전쟁 (White Badge)》은 ‘한국 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미국 독자에게 거의 아무런 신비감을 주진 못한다. 부분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보다는 미국 TV와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한국의 어느 출판사 부장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새로운 하나의 장르를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점령지 소설(Occupation fiction)이라는 유형이다. 이 낯익으면서도 무서운 잡종 문화의 얘기에서 케케묵은 단골 악역인 ‘코카콜라 문화의 확산’ 뿐만 아니라 심야 토크 쇼와 할리우드 영화까지도 한몫을 거든다.
이 소설의 주요 줄거리는 전쟁과 그 전쟁에 대한 회상이다. 주인공 한기주는 전쟁의 영향을 받는다. 그는 미국이 주인공이었던 두 전쟁을 겪었는데, 하나는 자신의 나라에서, 다른 하나는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솔직하고 자전적인 소설의 작가인 안정효와 마찬가지로, 한기주는 월남전에서 미국 군대의 우방으로서 같이 싸웠던 한국군 백마부대의 참전 용사이다. 그 나라에서 경제에만 모든 신경을 쏟은 지도자가 바로 주인공이 전후에 겪는 우울증의 '범인'이라고 지적한다. 사회 적응에서 그가 겪는 어려움은 직장 동료와 여자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백마부대의 사단 표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색깔을 제목에 붙인 《하얀 전쟁 (White Badge)》의 초반부에서 해설자 역할을 하는 작가는 서울에서 혼자 앉아,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청와대 뒷산을 멍하니 쳐다본다. 그리고 그는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 저곳에 살았던 사람은 그가 이 민족을 위해 옳고 보탬이 된다고 생각해서 우리를 월남으로 보냈겠지. 어쩌면 국제적인 체면이나,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도와준 미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국가의 복지를 위해서 …. 그까짓 이유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들이 목숨을 바쳐 그 대가로 벌어들인 피 묻은 돈이 이 나라의 발전과 현대화를 위한 밑거름 노릇을 했으니 …. 그리고 우리들의 공훈으로 한국은 적어도 상류층은 세계로 큰 발걸음을 내디뎠지. 우리는 목숨을 팔았어. 용병의 민족으로부터.’
주인공은 월남전 후유증에 시달리는데, 베트남에서 복무한 미국 참전병사와 마찬가지로 평화가 찾아와도 제자리를 찾지 못해 발버둥을 친다. 용병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젖혀 두더라도, 이 참전병사는 같은 아시아인을 죽여야만 했던 악몽을 떨쳐 버릴 수 없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더욱 괴로워지기만 한다. 그는 매달 빨리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책을 찾으라고 지시하는 출판사의 출판 부장으로서 근무한다. (자신이 쓴 이 소설을, 속어를 많이 섞어 쓰는 유창한 영어로 번역해 놓은) 작가는 미국의 출판계와 비슷한 현장을 묘사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직업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편집 회의에서 모택동 사후의 중국 문화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는다. 한국전쟁 당시 적이었던 중국에 대한 작가의 논증적인 관점은 날카롭고도 재미있다. ‘사이공 거리를 공해로 가득 채우던 혼다와 스즈끼의 모터사이클 대군단이 이제는 중공으로 쳐들어가 대륙을 정복할 기세고, 상하이의 비디오 게임룸에서는 팩맨이 현대 서양 문명을 전자화한 상징들을 왕성한 식욕으로 집어삼키고……, 《스타워즈》와 《전쟁의 바람》도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이제 태평양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넘나드는 이런 내용들이 소설 전체에 흩어져 있다.
주인공 한기주는 미국의 베스트셀러보다는 그의 이성이 다른 분야에서 활동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의 뇌세포를 가득 채운 온갖 쓰레기 같은 지식은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어야 하는 내 직장 생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리고 그 지식에는 아시아로 송신되는 미국의 TV 쇼가 포함된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외국 소설 작품에서 미국 앵커에 대한 언급을 발견한다는 건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다. “어젯밤 피터 제닝스는, 새로 결혼했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남편의 유산을 아내가 어떤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임신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와, 아내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자식 사이에서 누가 상속권을 갖게 되느냐 하는 묘한 법적인 분쟁에 대해 보도했다.”
《하얀 전쟁》의 2부에서 독자는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활동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소설은 추진력과 독창성을 과시한다. 작가는 그의 소대에 소속한 우습거나, 용감하거나, 겁에 질렸거나, 고민에 빠졌거나, 개성이 강한 주인공을 창조했다. 그들의 대화는 그들에게 잘 어울릴 정도로 저속하지만, 그들이 참전한 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네이팜으로 불타버린 정글의 전투 장면들은 생생하다. 필자는 전쟁 중에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 형식적으로 주둔했던 몇 안되는 호주 곡사포 부대에 가본 적이 있지만, 사상자까지 내면서 싸웠던 우방으로서 한국군의 활동을 보도한 특파원은 당시에 거의 없었다. 작가는 그들의 존재를 인간적으로 그려 내고 있으며, 잔인한 만행들을 포함한 전투 장면들은 추악하지만 비극적이다.
‘우리들은 국제 분쟁에 참전하려고 외국 땅에 왔다.’ 한기주는 말한다. ‘하지만 이름도 없는 이 언덕 위에 진지를 구축하고 앉아서 우리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밤새도록 보초나 서고, 해가 뜰 때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가시나무 덤불에 불을 질러대고, 개인호와 교통호를 파고…… 두더지처럼 한없이 땅만 팠다.’ 하지만 나중에 죽음이 그의 소대를 찾아오고, 전쟁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옛 전우였으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립을 위한 길과 고뇌에 빠진 삶에서 생존을 위한 해답을 그에게서 구하려고 하는 어느 일등병이 서울에서 민간인으로 생활하는 한기주 병장의 주변을 그림자처럼 추격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미국 색채가 짙더라도 분명 《하얀 전쟁》은 사실적인 한국 소설이며, 작가는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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