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가신 감독의 첨밀밀 (1996년)
有緣千里來相會(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만나지만
無緣對面不相逢(무연대면불상봉) 인연이 없다면, 마주보고 살아도 만나지 못한다.
〈첨밀밀〉은 1996년 영화니까 벌써 30년이 지난 영화이다.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느껴지는 건 어린 시절 동경하던 배우가 늙어간다는 거다. 나에겐 장만옥이 그렇다. 홍콩을 여행하면서 홍콩을 여행하기 전에 봐야 할 3편의 영화가 있다고 여행 가이드가 말했다. 그 영화는 〈중경삼림〉, 〈첨밀밀〉, 〈색,계〉라고 한다.
〈첨밀밀〉의 영어 제목이 〈Comrades: Almost a Love Story〉이다. '동지들, 거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아주 오랜 전 이 영화를 볼 때는 홍콩이라는 도시, 두 주인공의 고향 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본 것 같다. 아주 오랜 만에 다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군(여명)은 돈을 벌려고 고향 톈진에서 홍콩에 도착한다. 텐진은 베이징에 가까운 곳으로 홍콩에 오려면 2천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기차를 타야 한다. 이교(장만옥)는 광저우 출신이다. 현재 광저우는 베이징, 상하이에 이어 중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 다음 큰 도시가 톈진이다. 예전에는 톈진이 3번째 큰 도시였다.
이교는 광둥어의 중심지인 광저우 출신이므로 홍콩에서 사용하는 광둥어를 잘하고, 중국 본토에서 교육을 받았으므로 표준 중국어인 베이징어 관화도 사용한다. 북경 표준어는 ‘표준화’된 형태로 거의 중국 전역에 퍼져있으며 싱가포르와 대만을 포함해 널리 사용된다. 하지만 광둥어는 광저우를 포함해 마카오와 광둥성, 그리고 홍콩에서 주로 사용한다.
이교의 부자가 되고 싶은 꿈을 저버린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은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에 뉴욕 증권 시장에서 일어난 주가 대폭락 사건이다. 이 대규모 폭락 사태는 홍콩에서 시작하여 서쪽을 향해 유럽으로 퍼졌고, 다른 증권 시장이 폭락한 이후 미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소군의 고모가 그리워 하는 윌리엄 홀든은 우리에겐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하다. 윌리엄 홀든은 중국계 의사 한쑤인의 소설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을 홍콩에서 촬영했다. 한국에서 영화제목은 '모정'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리펄스베이는 한국인에게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더 베란다>라는 레스토랑에서 촬영한 이안 감독의 '색, 계"를 더 많이 기억한다.


줄거리
1986년 ~ 1987년
누구나 그러하듯이 낯선 곳에서는 처음부터 좋은 환경에서 숙식하며 일할 수는 없다. 홍콩에서 소군과 이교의 만남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중국 본토출신이라는 것(다만 소군은 베이징과 가까운 톈진, 이교는 홍콩과 가까운 광저우 출신), 대만 가수 등려군을 좋아한다는 것, 자신의 꿈을 위해 홍콩에 왔다는 것뿐이다. 낯선 홍콩의 거리에 남겨진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다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소군에게는 홍콩에서 돈을 벌면 결혼하기로 한 약혼녀가 있었고, 이교에게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이교는 등려군 노래가 해금되고 나서 본토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는 생각을 떠올려 모은 돈을 자본금 삼아 등려군의 해적판 앨범을 팔아 돈을 벌어보려고 하지만 등려군은 아직 홍콩 사람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리고 등려군 노래를 듣는 건 본토 출신이라는 편견 때문에 본토 출신마저 그들의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교는 지금까지 모아둔 돈을 주식에 넣었는데 그것마저 1987년 홍콩 경제 위기로 모두 날려 버린다. 홍콩은 하루 아침에 돈을 날려 버릴수도 있는 자본주의의 정점이었다. 결국 이교는 악착같이 모은 3만 달러를 모두 날리고 안마시술소에서 일한다. 소군은 이런 이교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지만, 이교는 너무나 순진하고 순박한 소군의 마음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런 이교에게 돈 많은 암흑가 보스 표형이 나타나고, 조건 없이 다가오는 소군의 천진한 사랑과 불안한 미래 속에 갈등하던 이교는 결국 소군의 곁을 떠난다. 소군은 계속 삐삐로 연락을 보내보지만 결국 받지 않는 이교. 소군 역시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하고 삐삐로 '안녕'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1990년
소군은 톈진에서 온 애인과 결혼하게 되고 이교에게 청첩장을 보낸다. 표형의 애인이 된 이교는 소군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소군과 3년 만에 재회한다. 세월을 거스른 듯 아직 서로의 감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예전에 두 사람이 함께 머물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새로운 곳으로 도피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교의 애인인 표형이 경찰로부터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받으며 추적당하고, 표형은 지인을 배신할 수 없어 대만으로 밀항을 도모한다. 이교는 결국 표형과 함께 대만을 거쳐 미국에 밀입국하는데. 이교가 떠나버렸으나 소군은 이교에게 했던 약속대로 애인에게 이교를 사랑한다는 걸 고백하고 헤어진다.

1993년
소군은 홍콩에서 일하던 식당의 요리사를 따라 미국 뉴욕에 정착해 차이나타운의 한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여섯 번이나 장소를 옮겨 가며 도피 생활 중인 표형과 이교도 뉴욕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표형은 소군이 일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자주 포장해 오지만 서로 마주치지 못한다. 이교가 빨래방에 간 사이, 담배를 피우던 표형은 시비를 걸어온 무리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다. 표형의 죽음 이후 만료된 비자가 정부에 걸려 48시간 안에 미국에서 추방 당하게 된 이교는 이민국 직원과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던 중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소군을 본다. 택시에서 도망쳐 소군의 뒤를 쫓지만 번화한 뉴욕 한복판에서 결국 그를 놓치고 만다.

1995년
다시 뉴욕. 이교는 뉴욕에서 중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여행안내자 일을 하고 있다. 이교는 경제가 발전한 고향 중국 광저우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소군은 뉴욕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계속 일하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이교는 거리를 걷다 가게에 틀어놓은 TV에서 등려군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같이 TV를 보는 소군. 등려군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마주 보며 환히 웃는 두 사람.

다시, 1986년
홍콩 구룡역 열차.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소군과 이교가 반대편 좌석에서 머리를 맞대고 잠들어 있다. 사실 이교는 소군과 다를 바 없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홍콩으로 입국했던 것이다. 이교도 기차에서 내리면서 익숙하지 않은 홍콩을 두리번거린다.
"사랑은 타이밍이 아니라 운명이다."
소군과 이교는 사실 같은 날, 같은 기차로 홍콩에 도착했어요. 영화의 첫 장면이 곧 마지막 장면이 되는 이 구조가, 두 사람의 만남이 처음부터 필연이었음을 말해줍니다.
10년 동안 두 사람은 계속 어긋납니다. 한쪽이 다가가면 한쪽이 멀어지고,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만나지 못해요. 그런데 마지막 장면, TV에서 흘러나오는 등려군의 사망 뉴스 앞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게 됩니다. 처음 그들을 이어줬던 그 노래가, 10년이 지나 다시 그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죠.
이교가 나쁜 사람이 아닌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녀는 차갑거나 이기적인 게 아니라, 가난하고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소군의 순수한 사랑이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이유도, 이교의 그 선택들이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이유도, 결국 두 사람 모두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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