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회사 창립 기념일 덕에 뜻밖의 연휴가 생겼다. 황금연휴를 피해 조금이라도 한산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을 품고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이들에게 교과서에서만 보던 자금성과 만리장성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사진은 나중에 맥북으로 옮기다 모두 잃어버렸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지금도 선명하다.

자금성 — 너무 크고, 너무 붉은 곳
첫 목적지는 자금성(紫禁城), 오늘날 고궁박물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언이다. 자줏빛 하늘의 별자리를 뜻하는 '자미성원(紫微星垣)'에서 따온 이름으로, 황제는 곧 하늘의 중심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며 짓기 시작해 15년 만에 완공된 이 궁전은, 이후 명·청 두 왕조의 황제 스물네 명이 500년 가까이 머문 곳이다. 공사에는 전국 각지의 이름난 공예가 10여만 명과 민공 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건재 또한 나라 곳곳에서 실어왔다.

72만 제곱미터의 면적에 8,700개가 넘는 방이 들어선 자금성은, 10미터 높이의 성벽과 52미터 너비의 해자에 둘러싸여 있다. 수치로는 알아도, 막상 들어서니 그 규모에 잠시 넋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온통 붉은색과 금색으로 뒤덮인 화려함이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역사 유적 앞에서는 여유로운 마음과 편안한 시간이 필요한데, 이곳은 너무 크고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감정이 무뎌지는 느낌이랄까. 위압감과 경이로움이 뒤섞인 묘한 피로감이었다.



한 가지 씁쓸한 사실도 따라온다.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의 명령으로 고궁의 유물 대부분이 대만으로 옮겨졌고, 현재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화려한 궁궐의 외양 뒤에 빈 자리들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발걸음을 조금 무겁게 했다.
천안문 — 뉴스 속 그 문 앞에 서다
내게 천안문(天安門)은 '천안문 사태'라는 단어로 먼저 기억되는 곳이다. 정치적 이야기를 굳이 꺼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중국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배경으로 등장하던 그 문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붉은 성벽 위 마오쩌둥의 초상화. 수천 년 역사의 유적에 현대 정치 지도자의 얼굴이 걸려 있는 광경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이 장면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만리장성 — 장관 앞에 선 인파
베이징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져왔지만, 2004년 12월 중국과학원은 사람의 눈으로는 우주 공간에서 만리장성을 관측할 수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그러나 수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압도적이다. 지도상의 연장만 약 2,700킬로미터, 기복과 중첩 구간을 더하면 5,000에서 6,000킬로미터에 달한다.

패키지여행이다 보니 정확히 어느 구간을 걸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아마도 팔달령(八達嶺)이었을 것이다. 명나라 장성 중 관광객에게 가장 먼저 개방된 구간으로, 현재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만리장성이다. 현재 대외에 공개된 길이만 3,741미터이며, 21개의 성대와 적대가 포함되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성의 웅장함보다 엄청난 인파와 소음, 울퉁불퉁한 성벽 길의 불편함이 더 기억에 남는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돌 위에 서 있다는 사실보다, 다음 계단을 밟는 일이 더 급박하게 느껴졌다. 복원된 성벽 뒤편에는 세월의 풍화를 그대로 품고 있는 돌무더기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화려하게 정비된 것들 너머에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이화원과 원명원 — 약탈과 복원 사이
이화원(頤和園)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1750년 건륭제가 쿤밍호를 확장하고 만수산을 쌓아 조성한 이 황실 원림은,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해 만든 호수와 궁궐, 정원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상처 없이 오지 않았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모조리 약탈당했고, 1900년 의화단 운동 때는 8개국 서양 열강에 의해 다시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아,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해 중건에 나섰고, 1884년부터 1895년에 걸쳐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원명원(圓明園)은 한때 '만원지원(萬園之園)', 정원 중의 정원이라 불리던 곳이다. 강희제부터 함풍제까지 조성된 이 정원은 중국과 서양의 조경 예술이 어우러져, 강남의 수로와 유럽풍 석주·분수가 공존하는 독보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원명원을 약탈하고 건물을 불태웠다. 지금은 그 폐허가 오히려 역사의 증거로 남아 있다. 잿더미가 된 석주 앞에서, 아름다움이란 결국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생각했다. 전쟁 중에도 역사 유적만큼은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천단·798 예술구·후퉁 — 베이징의 또 다른 얼굴들
천단(天壇)은 역대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던 중국 최대의 제사 건축물이다. 패키지 일정에서는 유료 옵션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처음부터 포함해 놓으면 더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798 예술구는 이번 여행에서 뜻밖의 발견이었다. 1950년대 소련과 동독이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세운 718 연합공장이었던 이곳은, 1990년대 이후 경기 침체로 공장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자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중국 현대 미술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예술가들은 원래 공장이 지닌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 스타일을 최대한 살려 장식을 최소화한 채 독특한 전시·창작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냉전의 유산 위에 현대 예술이 조용히 피어난 그 풍경은, 화려한 궁궐들과는 전혀 다른 결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베이징 구도심 곳곳에 남아 있는 좁은 골목, 후퉁(胡同). 나는 이곳이 가장 좋았다. 황제의 금빛 지붕도, 성벽의 웅장함도 아닌, 낡은 벽돌 담 사이로 번지는 밥 냄새와 빨랫줄에 내걸린 옷가지들. 수백 년을 이어온 서민들의 일상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그 골목에서, 나는 비로소 베이징을 실감했다.


황제의 궁궐부터 서민의 골목까지, 베이징은 중국 역사의 모든 층위를 한 도시에 압축해 놓은 곳이다. 화려함과 상처, 복원과 약탈, 냉전의 잔해 위에 피어난 예술까지. 보면 볼수록 복잡한 감정을 남기는 도시였다.
언젠가 다시 가게 된다면, 그때는 패키지의 일정표 없이, 내 발걸음으로 후퉁 구석구석을 천천히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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