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가난한 천재 수학자, 케플러

2024. 4. 5. 13:36과학/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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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독재적이고 거만해진 튀코 브라헤는 베인 섬을 자신의 땅처럼 관리하였고, 나쁜 짓을 저지른 섬 주민을 마음대로 감금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국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1597년에 덴마크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2년 정도 독일을 여행한 뒤 측근과 함께 프라하로 건너가 그곳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를 알현했다. 그때, 체코에서 황실 수학자의 취임을 요청받는다. 이를 받아들인 브라헤는 프라하에서 35km 정도 떨어진 성에 관측 장비를 설치하고, 관측을 시작했다. 그곳에 보조로 초대한 사람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가난한 수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였다. 

 

Brahe kepler.jpg

프라하에 있는 케플러와 튀코의 기념비

 

브라헤와 반대로 케플러는 157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은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16세기 유럽은 전란이 끊이지 않았고, 아버지는 용병으로 나가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케플러가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전쟁터에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지만, 어느 날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케플러는 네 살 때 걸린 천연두 후유증으로 왼쪽 눈의 시력이 떨어졌고, 심한 피부염까지 생겨 평생을 앓게 되었다. 훗날 가족과 자신의 이력을 적어보았더니 마치 질병과 재난의 안내서 같았다고 한다. 그런 어린 시절, 젊은 두뇌에 강렬한 인상을 준 사건이 1577년에 일어났다. 케플러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밤, 밖으로 나가 보니 거대한 혜성이 밤하늘에 빛나고 있었고, 그것을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이때, 멀리 북쪽 베인 섬에서 브라헤가 이 별의 항적을 쫓고 있었다. 

 

Karlova str No4, Prague Old Town.jpg

프라하의 오래된 카를로바 거리. 케플러가 프라하 시절에 살았던 주택이 있다.

 

과학자의 전기에서 주인공의 재능이 흔히 과장되지만, 케플러는 과장이 전혀 없다. 케플러는 정말 천재 수학자였다.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천문학을 배우는 한편, 행성, 태양, 달의 운행에 관한 당시의 최신 이론도 몰래 배우고 있었다. 지도교수인 미하엘 메스틀린은 학교에서 당시 통설이었던 그리스인의 우주관을 가르쳤다. 바로, 주전원을 사용한 지구 중심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이었다. 하지만 메스틀린 교수는 상급 학생에게는 더 급진적인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이 중심이라는 개념을 가르치고 있었다. 케플러는 이 '태양 중심 모델'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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