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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역사

별을 관측한 거인과 별을 계산한 천재 — 브라헤와 케플러

by 도서관경비원 202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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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 있는 케플러와 튀코의 기념비

 

추락하는 별: 튀코 브라헤의 몰락과 새로운 출발

우라니보르크(Uraniborg)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가 북유럽 천문학의 중심지로 키우기를 기대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사람을 부패시킨다. 시간이 흐를수록 브라헤는 점점 더 독재적이고 거만한 영주로 변해갔다. 벤(Hven) 섬을 마치 자신의 왕국처럼 통치하며 죄를 지은 섬 주민을 재판도 없이 마음대로 감금하기에 이르렀다.

 

브라헤는 왕·교회·귀족이라는 세 가지 막강한 권력 모두와 사이가 틀어졌고, 결국 1597년에 벤 섬을 떠나 함부르크 근처의 로스토크와 반데스베크에 잠시 머물게 된다. 후원자였던 프레데리크 2세가 1588년에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크리스티안 4세는 브라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지원금도 끊기고 정치적 기반도 무너졌다. 한때 유럽 천문학의 정점에 섰던 사람이 이제 정처 없이 떠도는 망명자 신세가 된 것이다.

 

약 2년간의 긴 방랑 끝에, 1599년 브라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후원을 받아 프라하에 정착하고 황실 수학관(제국수학자)에 임명된다. 루돌프 2세는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그는 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튀코 브라헤를 궁정으로 불러들였고 수많은 연금술사들도 곁에 두었다. 브라헤는 프라하에서 35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베나트키 성에 관측 장비를 새로이 설치하고 관측을 재개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는 한 젊은 수학자를 보조로 초대한다. 그 이름이 바로 요하네스 케플러였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천재: 요하네스 케플러의 유년 시절

브라헤가 귀족의 피를 타고나 왕의 후원 속에 천문대를 지은 것과는 달리, 케플러의 삶은 출발부터 가혹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신성로마제국의 소읍 바일 데어 슈타트(Weil der Stadt)에서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케플러는 용병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선술집의 딸이었다. 가난은 그의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집을 비웠으며, 어떤 때는 한 번에 수 년씩 걸렸다. 어머니가 남편을 따라 집을 떠났을 때 어린 요하네스는 할머니 곁에 남겨졌다. 설상가상으로 네 살 때 천연두를 앓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근시에 복시까지 겹쳤고, 내장 기관도 약했으며 손가락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훗날 케플러가 자신의 가족과 이력을 돌아보며 기록한 글은 마치 질병과 재난의 연대기 같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바로 이 고난의 어린 시절에, 한 가지 경이로운 사건이 어린 케플러의 마음속에 씨앗을 심었다. 케플러는 여섯 살 때인 1577년, 밤하늘에 나타난 대혜성을 목격했다. 훗날 그는 "어머니께서 그것을 보기 위해 나를 데리고 높은 장소로 올라가셨다"고 회고했다. 병약한 몸으로 밤하늘을 가르는 빛의 꼬리를 바라보던 그 순간은, 훗날 행성 운동의 법칙을 밝혀낼 과학자의 탄생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 멀리 북쪽 벤 섬에서는 브라헤가 똑같은 혜성의 항적을 정밀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운명은 이미 같은 빛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던 셈이다.

금지된 지식과 태양 중심 우주론

케플러는 뛰어난 지적 능력 덕분에 뷔르템베르크 계몽정책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으며, 1589년 튀빙겐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신학 공부는 뒷전이었고, 미하엘 메스틀린 교수 밑에서 천문학을 열정적으로 배웠다.

 

메스틀린 교수는 이중적인 수업을 운영하는 영민한 학자였다. 공식 강의에서는 2세기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가 집대성한 지구 중심 우주론, 즉 주전원(周轉圓, epicycle)을 동원해 행성의 복잡한 운동을 설명하는 천동설을 가르쳤다. 이것이 당시 교회와 학계가 공인한 유일한 우주관이었다. 그러나 극소수의 학생들에게는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개념, 즉 태양 중심설을 별도로 가르쳤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일종의 금지된 지식이었다.

 

케플러는 이 '태양 중심 모델'에 즉각적으로 매료되었다. 수학적으로 훨씬 단순하고 우아한 이 체계는, 천재적인 수리 감각을 지닌 케플러에게 직관적인 진실처럼 다가왔다. 그는 단순히 이 이론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완성하려는 꿈을 품기 시작했다. 그 꿈의 완성은 훗날, 프라하에서 브라헤가 평생을 바쳐 수집한 관측 데이터를 손에 넣게 되면서 비로소 현실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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