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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자의 여행

🦌 사슴이 먼저 인사하는 도시, 1,300년 전 일본의 수도로 — 나라(奈良)

by 도서관경비원 2026.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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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이 여행을 계획한다면, 오사카나 교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숨겨진 보석 같은 도시가 하나 있다. 바로 나라(奈良) 이다. 오사카에서 긴테쓰 나라선이나 JR 야마토지선을 타면 약 30~40분, 교토에서는 긴테쓰 또는 JR로 약 35~45분이면 닿을 수 있어 당일치기 여행지로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

긴테쓰 나라선

 

나라는 710년 헤이조쿄(平城京)라는 도읍이 조성되어 784년까지 약 74년간 일본의 수도로 번영을 누린 고도(古都)다. 나라 시대(奈良時代)에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처음으로 공식 사용되었으며, 이 시기는 율령 국가의 전성기로서 천황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던 몇 안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교토나 도쿄처럼 화려하거나 번잡하지 않다. 오히려 그 고요함과 느린 시간이 나라만의 매력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사슴과 눈이 마주치고, 1,300년 된 목조 건물 앞에 서는 경험 — 그게 바로 나라다.


🦌 첫 만남은 역시 사슴 — 신의 사자를 만나다

나라역에서 나라 공원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면 채 10분도 되지 않아 길 한복판에서 사슴과 마주치게 된다. 처음엔 당황스럽다. 동물원도 아닌 도심 한복판에 사슴이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다.

 

이 사슴들은 단순한 야생 동물이 아니다. 현지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의 꽃사슴은 가스가타이샤의 신 중 하나인 다케미카즈치가 흰 사슴을 타고 미카사산에 나타났을 때부터 신성하고 영험한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이 사슴을 해치면 사형에 처해질 만큼 엄격하게 보호받던 동물이었다. 지금은 약 1,200마리의 사슴이 공원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공원 곳곳에서 판매하는 시카센베이(鹿せんべい, 사슴 전병) 를 사면 사슴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과자를 들고 있으면 옷을 당기거나 가방을 물기도 하니 소중한 물건은 미리 조심해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슴들이 먹이를 받기 전에 고개를 살짝 숙이는 동작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행동은 나라를 다녀온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장면으로, 인간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길들여진 자연스러운 습관이라고 한다.


🏛️ 도다이지(東大寺) — 세계 최대 목조 건물과 거대한 대불

나라 공원의 중심에는 도다이지(東大寺, 동대사) 가 있다. 사슴 무리 사이를 지나 참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거대한 남대문(난다이몬)이 나타난다. 좌우에 우뚝 선 금강역사상(인왕상)의 위용에 발걸음이 절로 멈추게 된다. 이 인왕상은 가마쿠라 시대의 거장 운케이와 카이케이가 만든 걸작으로, 높이만 8미터가 넘는다.

일본 나라시의 도다이지

 

도다이지는 745년 나라 시대 쇼무 천황의 명에 따라 창건되었다. 당시 일본은 잇따른 자연재해와 전염병, 정치적 혼란으로 국가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쇼무 천황은 불법(佛法)의 힘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대불 조성을 선언했고, 전국의 지방 사찰과 함께 국가 사찰 체제인 '고쿠분지(國分寺)'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도다이지를 그 총본산으로 삼았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나라의 대불'로 불리는 노사나불 좌상(盧舍那佛坐像) 이다. 현재의 대불전은 1709년에 재건된 것으로,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며 높이 약 15미터의 금동 대불이 안치되어 있다. 실물을 눈앞에서 마주하는 순간의 압도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무게만 약 500톤에 달하는 이 청동 불상은 보는 각도마다 다른 표정을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나라의 대불

 

대불전 내부에는 숨겨진 체험 하나가 있다. 기둥 하나에 뚫린 사각형 구멍이 대불의 콧구멍과 같은 크기라고 전해지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줄을 서서 통과를 시도하는 관광객을 항상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최초의 대불전과 청동 대불이 한국계 도래인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신라계 도래인 목수가 공사 총감독을 맡았고, 청동 불상 주조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기술이 깊이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나라와 한반도의 인연은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도다이지는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 3,000개의 등불이 켜진 신사

도다이지에서 원시림 사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춘일대사) 에 닿는다. 768년에 창건된 나라의 수호신사로,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씨신(氏神)을 모시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가스가타이샤

 

이 신사가 특별한 이유는 경내에 가득한 약 3,000여 개의 석등과 청동 등(燈) 때문이다. 이끼 낀 석등이 줄지어 늘어선 참배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주홍빛의 화려한 본전 건물들이 원시림 카스가야마(春日山)와 어우러져 신비롭고도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매년 2월 절분(節分) 무렵과 8월 오봉(お盆) 기간에는 만등회(萬燈會) 가 열린다. 경내의 모든 등불이 한꺼번에 밝혀지는 이 행사는 어둠 속에서 3,000개의 불빛이 하나씩 피어나는 장관을 연출한다.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환상적인 밤 풍경이다. 가스가타이샤 역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고후쿠지(興福寺) — 나라마치의 중심을 지키는 오층탑

나라역 근처로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 좋은 곳이 고후쿠지(興福寺, 흥복사) 다. 669년 창건된 이 사찰은 나라 시대 최고 권력 가문이었던 후지와라씨의 씨사(氏寺)로, 한때는 도다이지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했다.

고후쿠지

 

사루사와 연못(猿沢池)을 배경으로 하늘로 솟아오른 오층탑(五重塔) 은 높이 50.1미터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목조 오층탑이다. 이 탑은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풍경으로, 연못에 비치는 탑의 반영은 사진 애호가들이 반드시 담아 가는 명장면이다. 사슴들이 탑 앞 잔디밭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아수라상

 

경내의 국보관(国宝館) 에는 아수라상(阿修羅像)을 비롯한 수준 높은 불교 조각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특히 8세기에 제작된 건칠(乾漆) 기법의 아수라상은 세 개의 얼굴과 여섯 개의 팔을 가진 독특한 형태로, 일본 불교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고후쿠지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도 나라의 문화재'의 일부로 등재되어 있다.


🏛️ 나라국립박물관(奈良国立博物館) — 일본 불교 미술의 보고

나라 공원 한쪽에 자리한 나라국립박물관 은 1895년 '제국나라박물관'으로 개관한, 도쿄국립박물관 다음으로 역사가 긴 국립박물관이다. 도쿄·교토·규슈 국립박물관과 함께 일본의 4대 국립박물관 중 하나로, 불교 미술 전문 박물관으로서는 일본 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나라 국립박물관

 

박물관은 네 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된다. 1894년에 세워진 나라불상관(본관) 은 건물 자체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메이지 시대의 서양식 건축물이며, 내부에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어 '불상의 전당'이라고 불릴 만하다. 동쪽 신관과 서쪽 신관 은 도다이지 쇼소인(正倉院)의 고상식(高床式) 창고 구조를 모티브로 설계되었으며, 청동기관 에는 한 일본인 학자가 평생 수집한 중국 고대 청동기 수백 점이 전시되어 있다.

 

상설 전시인 명품전 에서는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포함한 다수의 불상과 공예품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박물관의 연간 최대 이벤트는 단연 쇼소인전(正倉院展) 이다. 매년 10월 말~11월 중순 동쪽 신관에서 열리는 이 특별전은, 도다이지 쇼소인에 보관된 1,300년 전 나라 시대의 보물들을 공개하는 연례 행사로 1946년 제1회 이후 70회를 훌쩍 넘겼다. 실크로드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서역·당나라·신라 계통의 유물들이 해마다 다른 주제로 선별 공개되며, 관람 예약이 일찍 마감될 만큼 인기가 높다.

 

박물관 지하에는 레스토랑 '하카제 타이무'와 뮤지엄 숍이 있으며, 불상을 캐릭터화한 굿즈 등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기념품도 눈길을 끈다. 관람 시간은 기본 9:30~17:00(금·토요일 일부 전시는 20:00까지)이며, 월요일 휴관이므로 방문 전 확인이 필요하다.


🏘️ 나라마치(ならまち) — 골목 사이에 숨겨진 옛 정취

역사 유적만이 나라의 전부가 아니다. 고후쿠지 남쪽으로 내려오면 나라마치 가 펼쳐진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형성된 상가 건물들이 좁은 골목 사이사이 남아 있어, 일본 옛 마을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나라마치를 걷다 보면 처마 아래에 빨간 헝겊 인형이 주렁주렁 매달린 집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미가와리자루(身代わり猿) 라는 부적으로, '원숭이'를 뜻하는 사루(猿)와 '떠나다'를 뜻하는 사루(去る)의 발음이 같다는 것을 이용해 재액을 대신 물리쳐 준다는 나라마치 특유의 민간 신앙이다. 이런 작은 발견들이 나라마치 산책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카페, 전통 공예품 가게, 갤러리, 전통 음식점들이 곳곳에 모여 있어 느긋하게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 나라에서 꼭 먹어봐야 할 것들

나라에는 꼭 맛봐야 할 개성 있는 향토 음식들이 있다.

 

카키노하즈시(柿の葉ずし) 는 감잎에 싸서 발효시킨 초밥으로 나라의 대표 향토 음식이다. 고등어나 연어를 감잎에 싸서 압착해 만들며, 감잎의 향과 발효에서 비롯된 독특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과거 나라가 내륙에 위치해 신선한 해산물을 구하기 어려웠던 데서 비롯된 보존 음식으로, 지금은 나라를 대표하는 미식이 되었다.

카키노하즈시 (출처: 우마미 정보센터)

 

나카타니도(中谷堂)의 쑥 찹쌀떡(よもぎ餅) 은 나라마치 근처에 위치한 가게로, 직접 눈앞에서 빠른 속도로 찧어주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갓 만들어진 따뜻하고 쫄깃한 찹쌀떡은 나라 여행의 기억과 함께 오래 남는다.

 

미와 소면(三輪そうめん) 은 일본 3대 소면 중 하나로 꼽히는 나라의 명물이다. 나라현 사쿠라이시 미와 지역에서 1,200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 소면으로, 가는 면발과 매끄러운 식감이 특징이다. 여름에는 차갑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먹는다.


🗺️ 나라 당일치기 추천 코스

아침 일찍 출발하면 나라의 주요 명소를 하루 안에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시간 일정
08:30 긴테쓰 나라역 도착
09:00 도다이지(동대사) — 남대문, 대불전, 이월당
11:00 가스가타이샤(춘일대사) — 석등길, 본전
12:30 나라마치에서 점심 (카키노하즈시 또는 미와 소면)
14:00 나라국립박물관 — 명품전 또는 특별전
15:30 고후쿠지(흥복사) — 오층탑, 국보관
16:30 나라 공원 산책 & 사슴과 교감
17:30 기념품 쇼핑 후 귀환

🚃 가는 방법

오사카에서: 긴테쓰 오사카난바역 → 긴테쓰 나라역 (급행, 약 40분, 560엔) / JR 오사카역 → JR 나라역 (야마토지 쾌속, 약 50분)

교토에서: JR 교토역 → JR 나라역 (야마토지 쾌속, 약 45분, 720엔) / 긴테쓰 교토역 → 긴테쓰 나라역 (특급, 약 35분, 760엔)


🌿 나라는 느리게 걷는 여행자를 위한 곳

나라는 교토의 화려함도, 오사카의 활기도 없다. 대신 1,300년의 시간이 조용히 쌓인 곳이다. 사슴과 어깨를 나란히 걸으며, 세계 최대 목조 건물 앞에 서고, 이끼 낀 석등 사이를 걷고, 3,000년의 불교 미술 앞에 잠시 멈추는 것. 그 소소한 경험들이 모여 나라만의 여운을 만들어 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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