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밤이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열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동남아의 밤은 식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몸으로 이해했다. 버스는 어둠 속을 달렸고, 창밖으로 야자수의 실루엣이 흘러갔다. 캄보디아는 그렇게, 소리보다 먼저 열기로 왔다.
시엠립: 돌의 기억
이튿날 아침, 앙코르와트 해자(垓字) 앞에 섰다. 사원은 정면으로 오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황갈색 수면 위의 반영으로 먼저 왔다. 실체보다 그림자가 먼저인 존재 — 그것이 앙코르와트의 첫인상이었다. 수면은 탁했고, 하늘은 맑았고, 그 사이 어딘가에 천 년의 돌이 떠 있었다.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제국의 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22년부터 1150년까지 약 28년에 걸쳐 세운 사원이다. 오늘날의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베트남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제국의 절정기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이만한 거대한 사원은 시바 신에게 봉헌하던 전통을 깨고, 앙코르와트를 질서의 신 비슈누에게 바쳤다. 사원의 정문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해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의한 것으로, 왕의 사후 세계를 위한 능묘 사원임을 짐작케 한다. 왕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사원은 완성되었다. 권력자의 죽음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을 만드는 것 — 그것이 건축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해자를 건너 안으로 들어서자 나가(Nāga) 석상이 맞이했다. 머리가 부채꼴로 펼쳐진 다두사(多頭蛇) 조각은 표면이 이끼와 풍화로 얼룩져 있었다. 크메르 신화에서 나가는 왕권과 물과 풍요를 상징한다. 앙코르와트의 참도 난간 전체가 나가의 몸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석상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원 전체를 떠받드는 신화적 뼈대임을 깨닫게 된다. 풍화는 뼈대를 드러낼 뿐, 부수지는 못했다.

성소 깊숙이 들어서자 비슈누 팔비상(八臂像)이 나타났다. 검은 사암으로 조각된 천 년의 신체 위에 금빛 비단 예복이 입혀져 있었고, 주황색 마리골드 화환이 목에 걸려 있었다. 이 상은 단순히 힌두교 신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자야바르만 7세가 훗날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꾸면서 앙코르와트에 있던 힌두교 부조와 석상들을 상당수 불상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사원으로 시작하여 불교 사원으로 전환된, 두 종교의 층위가 겹쳐진 공간이 되었다. 오늘 아침 누군가 이 상에 꽃을 가져와 걸었을 것이다. 돌은 과거형이었지만, 신앙은 현재형이었다.

사원 외벽을 돌자 복원 공사용 비계가 눈에 들어왔다. 영원해 보이는 탑 옆에 목재 지지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중앙 계단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 칠흑처럼 어두운 정상의 문. 크메르 제국 시기 앙코르와트의 3층은 오직 최고위 승려들과 국왕만 올라갈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크메르인들은 이 계단을 신을 향한 수직의 언어로 설계했다. 무릎으로 기어오르는 각도였다. 인간이 신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를 돌로 강제한 것이다.


회랑에서는 단체 관광객 무리가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 이동했다. 천 년의 부조가 새겨진 벽 앞에서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나 역시 그 무리 중 하나였다. 패키지 투어란 그런 것이다 — 개인의 감상보다 집단의 이동이 항상 한 발 앞선다. 그래도 괜찮았다. 앙코르와트는 혼자 느끼기에 지나치게 크다.


앙코르 유적지의 다음 목적지는 바욘(Bayon)이었다. 1177년 참파왕국의 공격으로 크메르의 수도 앙코르가 약탈되고 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자, 한 왕자가 침략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니 자야바르만 7세였다. 그가 앙코르 톰을 건설하고 그 중심에 바욘 사원을 세웠다. 사면에 얼굴이 새겨진 탑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었다. 자비로운지 냉담한지 판별하기 어려운 그 미소는 자야바르만 7세 자신의 얼굴을 본뜬 것이라고도, 관음보살의 얼굴이라고도 전해진다. 어느 쪽이든 수백 개의 눈이 사방을 바라보는 사원 —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장소였다.

마지막은 따프롬(Ta Prohm)이었다. 스펑나무가 사원 석벽을 감싸 안고 있었다. 뿌리가 돌 사이를 비집고, 줄기가 지붕을 덮고, 가지가 하늘로 뻗었다. 자연이 문명을 삼키는 것인지, 껴안는 것인지 판별할 수 없었다. 15세기에 이르러 앙코르 왓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적이 버려졌고, 크메르의 수도가 버려지게 된 가장 유력한 설은 시암(태국)의 침략이었다. 이후 수백 년간 밀림이 이 자리를 지켰다. 따프롬의 나무는 정복자가 아니라 보호자에 가까웠다.

그날 밤, 시엠립 펍스트리트는 네온사인으로 빛났다. 조니워커 간판, 크메르 음식 레스토랑, 외국인 관광객들. 낮에는 크메르 제국의 영광을 보고 밤에는 이 거리를 걷는 것 — 그 간극이 불편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엠립의 솔직한 얼굴이었다. 역사는 낮에 있고, 생계는 밤에 있다.

톤레삽: 물의 기억
시엠립 마지막 날, 톤레삽 호수로 나갔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담수호. 파란 보트에 오르자 주황색 구명조끼가 좌석에 얹혀 있었다. 배는 황토빛 강물을 가르며 나아갔다. 양안은 붉은 모래톱과 초록 덤불뿐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먹구름이 몰려왔다. 태양이 구름 사이로 수면을 가르며 빛을 내리꽂았고, 좌측 하늘은 폭풍 전야처럼 어두웠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수평선을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이것이 캄보디아다, 라고 생각했다. 찬란함과 어둠이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하는 나라.
프놈펜: 피의 기억
시엠립에서 프놈펜까지는 버스로 여섯 시간이었다. 붉은 흙길과 야자수가 끝없이 이어졌다. 차창으로 흰 문루와 금빛 법당을 가진 불교 사원이 스쳐갔다. 멈추지 않고 지나쳤다. 패키지 투어의 일정표에 그 사원의 이름은 없었다.

프놈펜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은 뚜올슬렝(Tuol Sleng), S-21이었다. 원래 고등학교였던 이 건물은 1975년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면서 고문·학살 시설로 바뀌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이곳을 거쳐간 수감자는 약 1만 7천 명. 살아남은 자는 열두 명 남짓이었다.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체커보드 타일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학교 복도의 타일. 그 위로 빛과 그림자가 줄을 섰다. 무엇이 더 견디기 어려웠냐 하면, 참혹함이 아니라 평범함이었다. 이곳은 처음부터 학교였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복도가 고문실로 이어지는 문들을 갖게 되었을 때, 건물 자체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타일은 그대로였고, 창문은 그대로였고, 복도의 길이도 그대로였다. 역사의 잔혹함은 때로 낯선 풍경이 아니라 지극히 익숙한 풍경 속에서 일어난다.

뚜올슬렝을 나와 왓프놈(Wat Phnom)으로 갔다. 프놈펜의 이름이 유래한 언덕 위의 사원. 나가 난간이 늘어선 계단을 올라 녹음 속의 법당 앞에 섰다. 학살의 기억 바로 다음에 신앙의 공간을 찾은 것이 의도였는지 일정표의 우연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서는 옳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을 본 뒤에는, 인간이 신에게 바친 가장 오래된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저녁, 메콩강 유람선에 올랐다. 강은 넓었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였다. 프놈펜의 스카이라인이 실루엣으로 물 위에 떠 있었다. 1975년 크메르 루주가 이 도시를 비웠을 때, 프놈펜은 하루아침에 유령 도시가 되었다. 200만 명의 시민이 농촌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지금 저 스카이라인을 채운 사람들은 그 이후에 돌아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강은 그것을 다 보았을 것이다.

강변 어딘가에 수상가옥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흐릿한 불빛이 수면에 번졌다. 관광 코스에는 없는 풍경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강 위에서 저녁을 맞고 있었다. 캄보디아는 그 불빛들의 나라이기도 했다.
시엠립과 프놈펜. 돌의 도시와 강의 도시. 한쪽에는 제국의 영광이 사암 속에 새겨져 있고, 다른 쪽에는 20세기의 학살이 타일 복도 속에 새겨져 있다. 캄보디아는 기억의 나라다. 다만 그 기억이 너무 많고, 너무 무겁고, 때로는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 문제다. 그 무게를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패키지 투어의 일정표는 언제나 예정보다 빨리 끝났고, 버스는 떠났고, 나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어떤 장면들은 이동하지 않았다. 해자 위의 반영, 타일 복도의 빛과 그림자, 메콩강의 먹구름. 그것들은 지금도 어딘가에 고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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