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과 황금빛 돔에 압도당한 다음 날, 타슈켄트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슬람 건축과 소련의 유산, 그리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한국의 흔적. 이 도시는 단 하루로 다 담기엔 너무 복잡하고, 그래서 더 재미있다.
응용예술 박물관 — 아름다운 천장과 커피 한 잔
하루의 첫 목적지는 국립 응용미술관(Museum of Applied Arts)이었다. 1937년에 설립된 이 박물관에는 목각, 도자기, 자수, 금세공 등 우즈베키스탄 장식 미술 관련 유물 4,000점 이상이 소장되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처음 만나는 공간의 천장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내가 두 번째 손님이었던 탓인지, 보안요원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다행히 박물관 한쪽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맑은 날씨, 화려한 공예품, 그리고 커피 한 잔. 더 바랄 게 없는 아침이었다. 나오는 길에 포토북을 한 권 집어 들었다. 못 사면 후회할 것 같았다.
벤치에 잠깐 앉았더니 옆에 있던 경찰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냐고 시작해, 자기 이름은 '호랑이'를 뜻한다고 했다. 사진도 같이 찍었다. 원래 내향인인데, 여행을 다니다 보니 이런 우연한 만남이 그리 낯설지 않아졌다.





지하철역은 궁전이다 — 코스모나프틀라르와 알리셰르 나보이
다음 목적지는 지하철역이었다. 타슈켄트 지하철역들은 각 역의 벽과 바닥이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마감되어 있고, 도자기 조형물과 샹들리에 같은 조명이 장식되어 있어 마치 궁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구소련 국가들의 지하철역이 아름다운 건 우연이 아니다. 방공호 역할도 겸했기에 지하 깊숙이 파고, 그만큼 공을 들여 꾸몄다.
코스모나프틀라르(Kosmonavtlar, 우주인) 역은 그 이름 그대로 우주 탐사를 주제로 꾸며졌다. 유리 가가린, 발렌티나 테레슈코바 같은 소련 우주인을 기리는 세라믹 메달리온이 벽을 장식하고, 천장은 은하수처럼 유리 별들이 빛난다. 2018년까지 타슈켄트 지하철은 전략 시설로 간주되어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으나, 그 이후 금지가 해제되어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다. 냉전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다.
알리셰르 나보이 역으로 이동하면 분위기가 또 달라진다. 벽 가득 티무르 시대의 시인 알리셰르 나보이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부조가 펼쳐진다. 타슈켄트 지하철은 시간제 요금이라, 중간에 내려 구경하다가 다시 탑승해도 추가 요금이 없다. 이걸 모르면 손해다.





초르수 바자르 — 타슈켄트의 부엌
지하철 종착지는 초르수역. '초르수'는 '네 개의 물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실크로드 시대의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푸른 돔 지붕 아래에는 견과류, 말린 과일, 향신료, 생고기 정육점이 한 공간에 뒤섞여 있다. 냉장 시설 없이 진열된 고기 옆에 알록달록한 향신료가 수북이 쌓인 풍경은 낯설면서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시장에서 납작 복숭아를 하나 사 먹었는데, 그 달콤함은 잊기 어렵다. 그리고 어디선가 김치와 나물 무침 냄새가 났다. 타슈켄트에는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하는 고려인 커뮤니티가 이 도시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갔다가, 소련의 강제 이주 명령으로 시베리아를 거쳐 이 땅까지 흘러온 사람들. 그 강인한 생존력 앞에서 절로 숙연해진다.



우즈베키스탄 필라프, 꼭 먹어야 한다
배를 채우러 필라프 체인 식당 BESH QOZON으로 향했다. TV에서 봤던 바로 그 음식이다. 소고기 필라프와 삼사(솜사)를 주문했다. 볶음밥 같지만 특유의 느끼함이 있어, 마늘·고추·오이로 구성된 채소 한 접시를 함께 시킨 건 신의 한 수였다. 채소 없이 필라프만 먹었다면 꽤 버거웠을 것이다.



미노르 모스크와 길거리 우연들
식사 후 미노르 모스크로 걸음을 옮겼다. 고대 벽돌 모스크들과 달리 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현대식 모스크로, 전통 동양 건축과 현대 양식을 혼합해 지었다. 가는 길에 결혼식 나팔 소리가 들렸고, 전통 문양으로 채색된 건물 외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행의 진짜 재미는 이런 계획 없는 순간들에 숨어 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Seoul National Park in Tashkent'. 2014년 서울시와 타슈켄트시가 함께 조성한 공원으로, 한국식 정자와 연못, 소나무와 무궁화가 자라고 있다. 공사 중이라 담 너머로 구경하는 데 그쳤지만, 뭉클했다.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엔 '서울문(SEOUL MUN)'이라는 복합 상업 공간이 나왔다. 서울의 운하 거리를 모티브로 튀르키예 건축가들이 설계했다고 한다. K-컬처가 어느덧 이 중앙아시아의 도시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마지막 날, 아미르 티무르 박물관
귀국 비행기를 기다리며 들른 아미르 티무르 박물관은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외관이 수수해 보여 기대를 낮췄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5,000점이 넘는 유물이 가득했다. 티무르 왕조와 관련된 지도, 무기, 화폐, 미니어처, 희귀 사본, 도자기, 보석류 등 다양한 전시품을 통해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번성했던 제국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가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타슈켄트는 사마르칸트처럼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구소련의 유산, 실크로드의 기억, 고려인의 애환, 그리고 K-컬처의 물결까지 — 이 도시는 시간의 층위가 오묘하게 쌓인 곳이다. 일정을 짜지 말고, 그냥 걸어보길 권한다. 타슈켄트는 그렇게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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