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때로 목적지보다 그 도시에서 무엇을 느꼈느냐로 기억된다. 2003년, 나는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명목은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전기공학 학회 참석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학회는 나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영어도 일어도 변변치 않던 사회 초년생에게 낯선 언어가 오가는 회의장은 그저 소음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회의장을 등지고 도시로 나섰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었다.
한 가지 후회가 있다면 바로 사진이다. 당시 디지털카메라는 꽤 비쌌고, 휴대폰 카메라는 성능이 형편없었다. 그 여행에서 남은 건 오롯이 기억뿐이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던데, 이제 와서야 필름 카메라라도 살걸 싶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렌즈 너머가 아닌, 두 눈으로 온전히 세계를 담았으니까.
🌿 고요함을 처음 배운 곳 — 산케이엔 정원
번잡한 도심을 피해 처음 찾아든 곳은 산케이엔 정원이었다. 비단 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실업가 하라 산케이가 1906년 공개한 175,000㎡ 규모의 이 정원에는 교토와 가마쿠라 각지에서 옮겨온 역사적 건축물들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흘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일본식 정원'이라는 미학을 온몸으로 느꼈다. 한국의 정원이 자연 그 자체를 담아내는 것이라면, 일본의 정원은 자연에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한 것이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완전히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정원 한편의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얇은 가이드북 한 권을 샀다. 꽤 비쌌다.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그 한 권의 구매가 이후 내 여행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때부터 어느 여행지에서든 포토북을 사는 버릇이 생겼다. 사진을 찍는 대신 그 순간에 집중하고, 기억은 책으로 남기는 방식으로. 산케이엔은 내게 정원을 좋아하게 된 이유이자, 여행을 대하는 자세를 처음 가르쳐준 곳이다.
🌃 처음으로 '세계'를 실감한 밤 — 미나토 미라이 21
요코하마를 대표하는 지역은 단연 미나토 미라이 21이다. '미나토'는 항구, '미라이'는 미래. 그 이름처럼 1983년부터 시작된 이 개발 프로젝트는 조선소 부지와 매립지를 합쳐 186ha의 신시가지를 빚어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자리에서 공존하는 이상한 도시. 처음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도착하자마자 눈을 압도한 건 랜드마크 타워였다. 73층짜리 거대한 빌딩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서울도 자주 가지 않던 지방 청년에게 그 건물은 충격 그 자체였다. 63빌딩보다도 높은 그 앞에 서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세계'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얼마나 작은 세계에서 살아왔는지를.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코스모 클락 21 대관람차가 반짝이는 조명으로 항구의 밤을 수놓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로도 유명한 그 대관람차는, 어릴 때 일본 만화 속에서만 보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허구인 줄 알았던 장면이 실제로 내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의 감각은, 20년이 넘은 지금도 선명하다.

🥢 중국도 일본도 아닌 제3의 맛 — 차이나타운과 라면 박물관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개항 이후 일본을 찾아온 화교의 후손들이 전통의 맛과 문화를 지켜온 거리다. 선린문을 비롯한 동서남북의 패루와 마조묘, 관제묘 등 중국 양식 건축물이 즐비하고, 화려한 등불과 음식점들이 골목을 메웠다.

그 거리에서 느낀 건 묘한 이질감이었다.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는 독특한 제3의 문화. 한국의 중식이 중국의 중식과 다르듯, 이곳 일본의 중식도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식 하나에도 역사가 스며들고, 이민의 흔적이 맛으로 남는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 베이 브리지 아래를 지나며 — 첫 번째 '연결'
학회 행사로 배를 탈 기회가 생겼다. 항구를 가로지르는 크루즈 위에서 요코하마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펼쳐졌다. 공학도였던 나에게 요코하마 베이 브리지 아래를 배로 통과하는 경험은 남달랐다. 저 구조물을 누가 어떻게 설계했을까. 저 하중을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여행자이기 이전에 엔지니어의 눈으로 다리를 올려다봤다.

배 안에서 NEC 엔지니어를 만났다. 서로 어설픈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일본 기업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 그 짧은 대화는 내 생애 첫 번째 해외 '연결'이었다. 언어가 달라도, 배경이 달라도, 같은 분야를 향한 열정 하나로 대화가 이어진다는 것. 그것이 여행이 줄 수 있는 가장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첫 여행이기에 어설펐고, 첫 여행이기에 더 깊이 남았다
요코하마는 내게 세계를 처음 보여준 도시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깊이 탐험하지도 못했다. 학회장을 일찌감치 빠져나온 어설픈 사회 초년생의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하지만 산케이엔의 고요함, 미나토 미라이의 야경, 차이나타운의 복잡한 골목, 베이 브리지 아래를 지나던 그 설렘은 여전히 선명하다. 사진 한 장 없이, 기억 속에만 남은 그 장면들이 오히려 더 또렷한 건, 그것이 내 두 눈으로만 담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첫 여행은 늘 그렇다. 어설프기에 더 깊이, 낯설기에 더 선명하게.
🗺️ 추천 코스 산케이엔 정원 → 미나토 미라이 21(랜드마크 타워·코스모 클락 21) →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 모토마치 공원 → 야마테 234번관 → 신요코하마 라면 박물관 → 야마시타 공원 → 오산바시 국제여객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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