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산티아고를 순례하는 마음 안내서

2024. 6. 19. 20:56기타/금주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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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번역자도 존중하지만 원작자를 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가톨릭성경을 기준으로 번역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루카 복음서 22장 38절

그들이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것이면 넉넉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책을 읽다 보면 카를로스 카스타네다를 자주 언급한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 1925~1998)는 페루 출신의 미국인 문화인류학자로, 고대 중남미의 톨텍 문명에 기원을 둔 마법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야키 인디언 샤먼 돈 후안 마투스(Don Juan Matus)와의 도제 수행 과정을 기록한 10여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그렇게 그와 헤어지고 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난 그때의 경험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비범한 것은 '평범한 사람의 길'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역시 길은 인생과 비슷한 것일까!


나에게 생애 첫 책인 『순례자』를 쓰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도, ‘평범한 사람의 길’을 계속 따라 걷기 위해 매일 치러내야 하는 나 자신과의 ‘믿음의 싸움’에서 존엄과 끈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날 북돋워 준 것도 역시 그것이었다.

 
'선한 싸움'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대한성서공회 《디모데전서》 6장 12절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가톨릭 성경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6장 12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가톨릭 성경에는 사실 '선한 싸움'이란 단어는 없다.
 
《순례자》에서 믿음을 의심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사자(?, 이건 나중에 고민해 보겠다.)의 유혹도 자주 등장하므로 '선한 싸움'보다는 '믿음의 싸움'이 더 적합해 보인다.


 

세하 두 마르(Serra do Mar) from 위키피디아

 
《순례자》 초반 코엘료가 종교 의식을 한 세하 두 마르 산, 종교 의식을 할 만큼 신비롭다.
 

스승은 칼집에 꽂혀 있는 나의 새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마스터와 검은 왠지 낯설다. 흔히 알고 있듯이 검은 양 날을 쓰는 칼이고, 도는 한 날을 쓰는 칼이다.
 
다시 루카 복음서 22장 38절을 살펴 보면,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냥 이라고 하는 게...


“그 탐욕으로 그대는 또다시 자신의 칼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할 것이야.
오만함으로 그대는 평범한 사람 가운데서 칼을 찾아야 하네.
비범한 사람이 되려는 미혹으로부터 그대에게 이미 주어졌던 것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투쟁해야 할 것이야.”

 
'평범한 사람의 길'이 이 책에 자주 등장하므로 '비범한 사람이 되려는 미혹'은 그 반대일 것이다.
 
현대어로 생각하면, 무언가 '인텔리 의식'을 말하는 건 아닐까?
 
인텔리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회 계층. 또는 지식이나 학문, 교양을 갖춘 사람. 본래는 제정 러시아 때에 혁명적 성향을 가진 지식인을 이르던 말이었다. =지식층.

 
비범한 것은 '평범한 사람의 길' 위에 존재하므로 비범한 사람이 되려는 미혹을 버려야 한다.
 
비범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끼는 것은 평범한 사람을 무언가 하대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 똑같은 걸 사줄 테니까. 여기 스페인 기념품점에 가면 저런 건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뭘.”

 


첫 번째 순례길은 성 베드로의 시신이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상징은 십자가이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로마의 방랑자’라고 불렸다.

 

성 베드로 대성전 from 위키피디아

 

두 번째 길은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성묘성당〉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종려 가지 든 이들’이라고 불렸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를 맞아준 이들이 흔들었다는 종려나무 가지가 그 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묘 성당

 
이 문장이 번역서에서 가장 큰 오류라고 생각한다.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 난 알고 있다. 번역가도 존중한다. 실수할 수 있다.
 
‘종려가지 든 이들은 영어로 palmist라고 하는데, palm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뜻이 있어서 이를 간혹 ‘수상가手相家나 손금쟁이’로 번역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똑같은 철자로 종려나무라는 뜻이 있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예수님을 환호하는 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길바닥에 깔았다는 성경의 기록에 따라 여기서는 ‘종려가지 든 이들’로 번역하였다. 참조-마태 21,8 마르 11,8


이렇다고 한다.
 

세 번째 길은 이베리아반도에 묻힌 사도 야고보의 성 유골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곳은 어느 날 밤 양치기가 들판에서 빛나는 별을 봤다는 곳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후 성 야고보와 성모마리아가 복음을 전파하려고 복음서의 말씀을 가지고 그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그곳에는 콤포스텔라(별들의 들판)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오래지 않아 모든 기독교도 국가의 여행객이 몰려드는 도시가 세워졌다. 이 신성한 세 번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순례자’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그들은 가리비껍데기를 상징으로 선택했다.

 
성 야고보의 유골이 있는 곳은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례지 성 베드로 대성전 거룩한 성묘 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순례 로마의 방랑자 종려 가지 든 이들 순례자 (The Pilgrimage)
상징 십자가 종려 나무 가리비껍데기

가리비껍데기가 이 순례길의 상징이 된 것은 첫 번째로 성 야고보의 유해가 스페인에 도착한 것과 관련된 전설 때문이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서기 44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성 야고보의 시신을 그가 원래 선교하였던 스페인으로 모셔 왔다. 운송선이 해안에 도착하였을 때 시신을 운반하려던 말이 겁을 먹는 바람에 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말과 말에 타고 있던 이, 그리고 성인의 시신이 모두 가리비껍데기의 보호를 받아 기적으로 무사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사실 야고보 대성당이 있는 갈리시아 해변은 오늘날도 많은 가리비껍데기를 발견할 수 있다. 가리비가 순례길의 상징이 된 것은 기나긴 순례의 고행을 마치고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던 이들이 현지 기념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가리비를 가지고 돌아가 사제에게 순례 사실을 입증하였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가리비를 원하던 초기 순례자는 성 야고보의 묘소가 있는 대성당을 지나 피니스테레(Finisterre, 직역하면 ‘땅끝’)라는 곳까지 순례를 계속했는데, 12세기부터 현재의 대성당 근처에서 상인이 가리비껍데기를 팔기도 했다. 가리비가 이렇게 성지 순례자에게 일종의 기념품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편에서는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는 용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출처] 조개껍질이 성지 순례의 상징이 된 이유|작성자 benjaminkim


 

12세기경 스페인은 이베리아반도를 침략해 온 무어인과 싸우면서 성 야고보의 신비주의를 이용하였다. 순례길을 따라 여러 게릴라가 조직되었고, 사도 야고보의 유골은 마호메트를 등에 업은 이슬람교도를 물리치는 강력한 영적 보루로써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레콩키스타가 끝나자, 강력한 힘을 가진 게릴라가 위협 세력이 될 것을 두려워한 스페인 왕은 그들이 귀족계급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산하였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8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한 이베리아반도 지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일어난 기독교도의 국토회복운동이다. 1143년에 포르투갈 왕국을, 1469년에는 에스파냐 왕국을 건설하고 1492년에 이슬람교도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함으로써 종식되었다.
 
718년 펠라기우스가 코바동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성립을 선포하였으나 그의 생애 동안 이 왕국은 게릴라 전투에 기반한 군사 집단에 불과하였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영토를 확보하고 실질적인 국가로서 자리잡은 것은 펠라시우스의 손자인 알폰소 2세 시기였다.
 
레콩키스타의 역사에서 스페인에서는 게릴라 전투에 기반한 군사 집단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게릴라(guerrilla)는 주로 적의 배후나 측면에서 기습ㆍ교란ㆍ파괴 활동을 수행하는 특수 부대나 비정규 부대를 의미하는 데 스페인어로 발음에 따르면 게리야이며, 스페인 내전 이후 전 세계에 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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