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8. 15:09ㆍ카테고리 없음
19세기 화학자들은 물질을 원소로 분해하는 데 열중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원소를 결합하여 지금까지 없었던 인공 물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인공 물질은 전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된다. 이때 원료로 가장 많이 이용한 건 의외로 석탄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석탄은 난방이나 동력원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가스화되어 가정의 불을 밝히게 되었다. 가스화 과정에서 콜타르(Coal tar)라는 끈적끈적한 부산물이 생긴다. 1820년, 찰스 매킨토시는 이 물질을 의복의 방수용으로 이용했다. 이것이 매킨토시 레인코트의 시작이다. 이 성공이 계기가 되어 콜타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되게 되었다.
런던 왕립화학대학 초대 교수로 초빙된 독일인 화학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호프만은 콜타르가 탄소, 수소, 산소, 질소의 복잡한 합성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소들의 배열을 바꾸면 당시 가장 필요로 했던 약인 퀴닌(quinine)을 합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퀴닌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던 말라리아의 유일한 치료제였다. 불행히도 호프만 자신은 퀴닌을 합성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연구가 계기가 되어 나중에 어떤 화학물질의 대량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말라리아는 과거 제국의 몰락까지 가져온 무서운 전염병으로, 1800년대에는 열대지방의 사망원인 1위였다. 당시 열대지방을 식민지화하려던 영국같은 나라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영국군의 기록에 따르면 인도에서만 연간 2천5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는 2백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말라리아의 원인이 모기라는 사실은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신에 휩싸인 사람들은 나무 열매의 껍질에 거미를 넣어서 다니면 말라리아가 낫는다고 믿었다. 영국을 비롯한 식민지를 가진 나라에게 말라리아 대책은 국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말라리아 특효약인 키니네는 원래 키나라는 식물의 껍질로 만들었다. 이 나무는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의 산기슭에 자생하며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예로부터 해열제로 귀하게 여겨져 왔다.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산에서 길을 잃은 남자가 열이 나서 주변을 헤매다 키나 나무가 울창한 호숫가에 이르렀다. 그 호숫물을 마셨더니 너무 써서 독이 들어있는 줄 알았지만, 이때 의식이 몽롱해서 그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호숫물을 마시고 잠깐 눈을 붙이자, 아까까지의 열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그 후 예수교 선교사들이 이 나무껍질을 유럽으로 가져가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량이 부족했다.
키나 나무는 성장이 느리고 특정 지역의 특정 환경에서만 자란다. 영국의 경우 인도 한 나라에서도 1년에 750톤이 필요했다. 그러니 사람들을 말라리아로부터 지키려면 대량으로 저렴한 말라리아약이 필요했던 건 당연하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과학의 힘에 의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키나 나무껍질의 유효 성분이 퀴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합성할 것인가였다.
런던의 이스트 엔드 지역에 윌리엄 퍼킨이라는 야심 찬 젊은 화학자가 있었다. 1838년생으로 새로 생긴 왕립화학대학에서 공부하고 폰 호프만의 밑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호프만은 퍼킨에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던 콜타르 추출물에서 퀴닌을 만드는 연구를 추천했다. 젊었던 퍼킨은 자기집의 다락방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먼저 콜타르 추출물로 아닐린 황산이라는 물질의 합성을 시도했다. 생성된 것은 새까만 가루였다. 이것을 시험 삼아 알코올에 넣어 녹여 보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색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창백한 자주색(mauve)이었다. 비단 옷감을 염색하여 친구에게 보여 주자, 이것은 염료로 반드시 돈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색에 가장 가까운 색은 자주색(Purple)이었다. 그리고 이 자주색은 역대 로마 교황의 망토에 사용한 것처럼 고귀한 색으로 여겨졌으며, 그 염료도 매우 비쌌다. 어쨌든, 소라의 분비액에서 얻는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한 벌 염색하는 데는 수천 개의 소라가 필요했다. 퍼킨이 발견한 염료는 저렴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우수했다. 우선, 언제든지 같은 색을 낼 수 있었다. 또한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햇볕에 노출해도 옅어지지 않았다.
퍼킨의 자주색은 의상계에서 유행하였다. 1858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딸의 결혼식에서 퍼킨의 자주색 옷을 입었다. 이후 런던의 큰길은 자주색 옷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를 상징하는 색이 되었고, 퍼킨은 이 색으로 작위를 받았다. 덕분에 염색 산업은 한꺼번에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양한 색이 개발되고 염료를 제조하는 새로운 산업이 탄생했다. 이 염료는 산업 규모로 제조되기 시작한 최초의 화학물질이었으며, 비료, 비누, 다이너마이트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제 인공 합성 물질이 자연 물질을 대체하였다.
원래 이 퍼킨의 연구는 독일인 호프만이 권유하였다. 게다가 호프만의 독일 시절 연구 동료들은 영국에 있는 호프만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독일로 돌아와 크게 활약했다. 그 활약상은 숫자로 남아있다. 1878년 콜타르 생산량은 금액으로 환산하면 영국은 45만 파운드, 독일은 2백만 파운드였다. 독일 화학자들은 대학의 보호 아래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독일은 염료 수입국에서 단숨에 최대 수출국으로 도약했다.
독일인의 발명품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프리츠 하버와 칼 보쉬가 고안한 공기 중에서 질소를 '고정'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것으로 암모니아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어서 화학 비료가 보급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구 증가를 불러왔다. 만약 화학 비료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전 세계의 많은 지역이 기아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암모니아로 만든 질산염은 폭약 제조에도 사용할 수 있어서 폭약이 실제로 제조되었다. 또한 염료 생산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 유독한 염소가스가 대량으로 생성되었다. 이를 군은 새로운 무기인 독가스로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