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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북쪽 본토의 한 도시는 덜 화려하지만, 크레타와 이집트를 그리스, 에게해 섬, 소아시아 문명과 연결하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 나섰던 요새인 미케네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펠로폰네소스 산맥의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아마도 트로이에서 온 여행자, 페니키아에서 온 해적, 크레타섬의 해상 침입자들과 빈번하고 원치 않는 접촉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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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아 (튀르키예의 트로아스 평야 히사를리크 언덕)

 

미케네의 건축가는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잭이나 도르래 없이 거대한 벽돌을 다루었던 것 같다. 기원전 1300년 이전에 세워진 유명한 사자문(Lion Gate)에는 크기가 15×7×3½ 피트이고, 무게가 거의 30톤에 달하는 상인방이 있다. 높이가 10피트가 넘는 수직 기둥에 놓여 있다. 이집트에서처럼 흙 경사로에 끌어 올려 옮겨졌거나, 미케네 건축가가 기록을 남기지 않은 지렛대와 기타 도구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입구 양쪽에 각각 120톤의 돌을 놓았다. 그들은 무덤 중 하나에 100톤에 달하는 또 다른 석회암 상인방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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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의 사자

 

그러나 미케네 사람이 공학 역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기둥이 있는 인공의 아치 또는 둥근 천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원리를 지하 건축에 적용하여 거대한 원뿔형 또는 벌집 모양의 무덤과 돌로 저장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도로용 교량에 사용하기 위해 그러한 건축물을 지상으로 가져왔다. 이 도로는 짐을 싣는 동물과 도보 여행자만을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일련의 계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선반을 건너 돌출된 높이 주변에서 작업할 때 돌로 옹벽을 지탱하고 자갈이 깔린 암거를 통해 산의 급류를 사이에 두고 운반되었다. 코르벨 아치는 엔지니어링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진정한 아치는 에트루리아 시대와 로마 시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클리템네스트라의 무덤 입구

클리템네스트라의 무덤 입구

 

그리스의 초기 주민들은 급수와 배수의 가치를 이해했다. 미케네 사람은 물에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들의 요새 내에서 물의 수위를 더 높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지하 수로를 통해 벽 근처의 우물로 가져왔고, 요새에서 우물까지 지하의 또 다른 통로를 만들었다. 아테네 북서쪽 언덕에는 좋은 경작지를 덮고 있는 지역에 100제곱마일 정도의 작은 물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기술자들이 1880년대에 재건한 이 호수(Copais)의 배수지와 운하가 4000년 전에 처음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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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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