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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내내 과학은 전쟁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80년 전쟁’의 강화회의가 1608년 말 네덜란드에서 개최되어 ‘12년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전쟁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개신교도 네덜란드인이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 강화회의 장소에서 나사우(Nassau) 공국의 황태자는 네덜란드의 안경 장인인 한스 리펠스하이에게 ‘소형 망원경’을 소개받았다. 이 안경은 이미 수백 년의 역사가 있어서 근시에는 오목 렌즈, 노안에는 볼록 렌즈를 이용하면 시력이 교정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리펠스하이는 이 두 렌즈를 조합해 초기 형태의 망원경을 만든 것이다. 그 해 그는 특허를 신청했지만 같은 시기에 또 다른 두 명의 신청자가 있어서 거절되었다. 왜 같은 시기에 같은 아이디어가 네덜란드에서 나타났는지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전쟁 중인 나라에서 망원경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했다. 또한, 각국의 외교관이 모이는 장소에서 시연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평화가 왔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그 정보를 모국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망원경의 소문은 순식간에 유럽에 퍼져나갔다. 1609년 초에는 소형 망원경을 파리의 퐁네프 근처에서 살 수 있었고, 그해 여름에는 이탈리아에서도 나타났다.

망원경의 구조는 매우 간단했다. 가느다란 원통의 양쪽 끝에 오목 렌즈와 볼록 렌즈가 끼워져 있었고, 배율은 대략 세 배였다. 소형 망원경의 소식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에 있던 어떤 수학자에게도 전해졌고, 그는 자기가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수학자의 이름은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그는 싸움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과소평가하고, 성공에 대한 열망과 포부가 남보다 강한 남자였다. 당시 갈릴레오는 후원자인 베네치아 총독의 보호 아래 파도바 대학에 봉직하고 있었고, 총독의 환심을 사려고 소형 망원경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총독은 이미 어느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선물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갈릴레오는 바로 제작에 몰두했고, 24시간 만에 무려 8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어 냈다. 이것을 경쟁자보다 먼저 원로원 의원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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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09년에 레오나르도 도나토에게 망원경을 보여주는 모습을 묘사한 19세기 그림


이때는 1609년 여름이었고, 결과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갈릴레오에 따르면 정계의 지도자는 그와 함께 몇 번이나 마을의 종루에 올라 크게 확대된 전망을 즐겼다고 한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이 해양 국가인 베네치아에 특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오스만튀르크의 침략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그는 “망원경이 있으면 해상에서 이전보다 빨리 적함을 찾아낼 수 있고, 적이 우리를 발견하기 두 시간 전에 우리는 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보상을 은밀히 기대하면서 총독에게 망원경을 선물로 주었다. 이 시대는 그런 사회였다. 그리고 총독은 재빨리 기분 좋게 반응했다. 총독은 갈릴레오의 보수를 두 배로 올려주고, 파도바 대학에서 지위를 종신으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모든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 법이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어딘가 다른 곳에 관심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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