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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케플러가 태양 중심의 우주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순수한 학문적 이유 외에 신비주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수한 수학자이자 점성술사였다. 당시에는 이 두 직업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그 무렵의 점성술은 매우 중요한 직업이었다. 루돌프 2세 등 당시의 지도자는 태양이 가져오는 낮과 밤, 달의 모양이 변하는 시간, 계절의 변화 등이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른 행성이나 별도 운명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점성술은 당시에는 합리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그런데 점성술에는 행성 운행의 치밀한 계산과 미래 위치의 정확한 예측이 필요하다. 튀빙겐 대학을 졸업한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수학 교수로 일했다. 그러나 월급은 너무 적었고, 수학 지식을 사용해 별점을 보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과 자기 삶에 대해 장황한 문장을 남겼지만, 거기에는 별자리에 의한 해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슬픈 사건, 예를 들면, 두 아이의 죽음이나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점성술을 바탕으로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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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성

 

케플러는 눈이 나빠서 별을 실제로 관측할 수 없었고, 관측 데이터도 마음대로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대 그리스인의 우주관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측한다. 그가 번뜩이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1595년 여름, 황도대에서 목성과 토성의 중첩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우주관과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그 제자가 제창한 5개의 완벽한 기하학적 입체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아마 케플러는 우주가 단순한 기하학적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1세기의 우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케플러는 그것이 신의 계시라고 느꼈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태양 중심주의와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이 결합하여 신앙과 우주관이 융합한다는 독자적인 생각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심의 태양은 신으로 나타나고, 항성은 그리스도, 행성과 그 사이의 공간은 정령이라고 확신했다. 현대의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행성의 연동에 관한 법칙’도 실제 이런 생각의 소유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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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의 정다면체 모형

 

케플러는 이 신앙과 천문학의 기묘한 융합에 관한 책을 1596년 《우주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는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또한 동시에 수학적 객관성을 목표로 하면서도 신비주의의 성격을 짙게 갖고 있던 당시 과학의 미숙함을 나타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케플러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 있었을 무렵, 유럽의 저명한 천문학자에게 생명이나 우주 등을 설명한 글을 보냈는데, 그것이 꽤 호평이었다. 그중 한 통이 브라헤에게 도착했고, 두 사람 사이에 편지가 오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케플러는 이 위대한 프라하의 덴마크인 조수로 채용되었는데, 케플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요청이었다. 그는 당시 참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동란이 유럽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그는 난민 상태였다.

 

[과학]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만남

그때까지는 별개였던 세 개의 흐름이 프라하에서 합류하여 큰 강이 되었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은 종교개혁과 왕궁의 존재였다. 인쇄 기술의 발명과 관측 장비의 발전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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