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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읽은 것이며, 폴란드어로는 니콜라이 코페르니쿠스라고 한다. 니콜라우스로 알려진 것은 당시 지성인이 주로 라틴어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폴란드 바르미아(Warmia)라는 곳에서 교회령의 관리직을 평생 맡고 있었다. 16세기로 접어들 무렵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주창한 태양 중심의 우주관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에 다닐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헌을 통해 이 개념을 알게 되었는데, 이 개념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 그리스는 물론 아라비아와 인도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개념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그리스의 정통 우주관과 비교하면 굉장히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Staszic Palace and Nicolaus Copernicus Monument

바르샤바의 코페르니쿠스 동상

 

보통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은 결코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앞서 연구한 사람의 업적을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실제 관측 결과와 맞추려고 역시 주전원이 필요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 때문에 그리스인의 주전원이라는 복잡한 생각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행성의 위치를 오늘날 알려진 올바른 배열 방법(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 수성, 다음이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순서)으로 했기 때문에 개별 행성이 공전에 필요한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우주관은 오늘날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배우는 단순한 태양 중심주의가 아니었다. 행성의 궤도는 완전한 원(circle)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가설은 아무래도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관측 결과와 맞추려고 지구를 포함한 각 행성은 태양이 아니라 가상의 어떤 중심점을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점은 태양의 중심에서 조금, 정확하게는 태양 지름의 약 세배 어긋났다. 복잡한 그리스 우주관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수많은 주전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은 결국 그가 단순화하려고 했던 그리스 우주관처럼 복잡해져 버렸다.

 

Nicolai Copernici torinensis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

 

코페르니쿠스가 최초로 제안한 우주관은 1510년에 《요강(要綱)》이라는 작은 책자로 발표되었는데, 당시 가톨릭교회는 아무런 동요를 하지 않았고, 실제로 교황이 참석한 강연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와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동시에 개신교 내부에서 《성경》의 한 자 한 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축어역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 생각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루어진 소책자가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개혁운동의 기수 루터의 분노를 샀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은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라는 이름의 루터파 장관이 관리하였는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늙은 코페르니쿠스는 이 사실 자체를 몰랐다. 오시안더는 “이 책은 행성의 운행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운행의 해명에 도움이 되는 수학적 가설을 논한 것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삽입했다. 이 둘 사이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사실 중요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수학이라면 어떤 내용의 발표도 허용되지만, 신이 창조한 세계의 해석이라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는 행위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문장을 추가했다는 것을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는 죽기 직전에 최초로 인쇄된 판을 손에 들고 평화롭게 잠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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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인쇄기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대중에게 많이 읽혔다. 1450년대 독일 마인츠라는 도시에서 구텐베르크와 그의 동료가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발명했는데, 이것은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대도시에는 출판업이 발달했고, 출판물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수고스럽게 손으로 베껴 쓰던 시대의 책은 많은 사람이 적은 수를 요구했기 때문에 책값이 너무 비쌌다. 그리고, 때로는 신성시되어 일부 부자나 유력자의 독점이었지만, 인쇄 기술의 보급으로 누구나 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말에는 목축에 관한 책부터 점성술에 관한 책까지 유럽 전역에서 약 1억 5천만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 등장했고, 1600년대 초에는 스웨덴, 시칠리아, 스페인, 아일랜드의 남쪽 같은 외딴 지역에도 1판이 도착했다.

 

 

[과학] 우주의 신비를 쓴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가 태양 중심의 우주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순수한 학문적 이유 외에 신비주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수한 수학자이자 점성술사였다. 당시에는 이 두 직업은 밀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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