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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말, 핼리는 케임브리지를 방문하여 이 대학의 수학과 교수이자 특히 광학 연구로 과학계의 명성이 자자했던 아이작 뉴턴을 만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핼리는 뉴턴에게 역제곱 법칙에 관한 질문을 던졌고, 뉴턴이 이미 증명했지만, 당시는 서류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뉴턴은 핼리의 격려를 받아 20여 년 전의 연구를 다시 검토하고 책으로 엮어내기로 결심했다. 원래는 핼리와 뉴턴이 모두 영향력 있는 회원이었던 왕립학회에서 출판 자금을 지원해야 했지만, 당시 왕립학회는 프란시스 윌로비가 쓴 《어류의 자연사》를 출판했다가 판매에 실패해 막대한 손실을 본 상태였다. 그래서 핼리는 직접 나서서 인쇄 비용을 지급하고 어류 도감의 인세로 상환받았다. 1687년에 출판된 뉴턴의 업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공헌 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줄여서 《Principia》라고 불렀다.

 

과학의 역사는 종종 개인의 뛰어난 두뇌, 번뜩이는 영감,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유레카’를 외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해지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매우 다르다. 아이디어가 시대정신으로 등장하여 화제가 되고, 기술의 발전으로 사물을 보거나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역사적 사건으로 변화의 기회나 추진력이 생긴다. 항상 맥락이 있다. 아이작 뉴턴과 그가 이룬 발전은 과학사의 한 부분이지만, 그는 '천재'라는 단어를 적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위인 중 한 명이다. 1643년 링컨셔의 울즈소프에서 태어난 뉴턴은 복잡하고 고립된 사람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비참했다. 한 번은 어머니와 계부가 있는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는 집을 떠나 교육을 받다가 16세 때 계부가 사망하자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농사를 잘 짓지 못해 케임브리지 대학에 근로장학생으로 보내져 다른 학생들의 하인 노릇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러다 전염병의 위협을 피해 1665년 링컨셔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불과 2년 만에 가장 유명한 과학과 수학을 공부하게 된다. 166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가 트리니티 대학의 연구원이 된 그는 비밀스럽고 은둔적이며 강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지적인 거인으로 성장했다. 뉴턴과 그의 업적은 계몽주의 시대에 과학적 사고의 등불과 같은 빛나는 사례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이단에 가까운 종교적 신념을 가졌으며 신의 마음을 설명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게다가 그는 평생 연구의 대부분을 연금술을 탐구하는 데 보냈다. 실제로 그는 한쪽에서는 오컬트와 신비주의, 다른 한쪽에서는 진정한 과학의 시작 사이에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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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은 프리즘이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과 백색광을 재결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684년 에드먼드 핼리가 그를 방문했을 때 뉴턴은 이미 무지개의 색이 프리즘을 통과해 백색광으로 재결합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스펙트럼의 성질을 증명한 상태였다. 그는 이미 우리가 미적분학으로 알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수학을 발명하여 운동 분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핼리에게 말했듯이 그는 이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힘의 성질을 알아냈다. 그는 그 힘이 실제로 타원 궤도를 그리며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을 해냈다. 그리고 그는 궤도에 대한 이러한 수학적 설명을 발사체와 낙하체의 움직임에 대한 갈릴레오의 실험 결과와 결합하여 행성들이 궤도에 머무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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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i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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