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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공학에 필수적인 많은 개념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시대 훨씬 이전부터 싹을 틔우고 있었다. 13세기의 작가인 요르단누스 데 네모어는 경사진 평면 위에 놓인 물체의 무게를 조사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 아이디어는 1586년 네덜란드인 시몬 스테빈이 '힘의 평행사변형 또는 삼각형'으로 발전시켜 한 점에서 평형을 이루는 세 힘은 삼각형의 변으로 크기와 방향을 모두 나타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메이플라워의 순례자들이 레이든에 머물고 있을 당시 네덜란드의 노인이었던 스테빈은 그의 삼각형을 ‘경이롭지만 경이롭지 않은’ 삼각형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 삼각형으로 정역학 또는 평형 상태의 고체 역학의 몇 가지 원리를 확립했는데, 엔지니어가 구조물을 경제적으로 설계하고, 똑바로 세워져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원리이다.

 

1586년 스테빈은 30피트 높이에서 다른 공보다 10배 무거운 납 공 두 개를 보드 위에 떨어뜨리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무거운 공이 먼저 보드에 부딪힐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과 달리 두 공은 동시에 보드에 부딪혔다. 갈릴레오는 경사면을 사용하여 낙하하는 물체의 법칙을 더 연구한 결과, 무게와 관계없이 물체가 균일하게 가속하고 속도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는 엔지니어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하위헌스는 나중에 가속도 상수의 값을 계산했다. 갈릴레오는 재료의 강도도 조사했는데, 이를 위해 만든 최초의 조잡한 테스트 기계가 바로 그가 만든 것이었다. 그는 구리 막대와 벽에서 튀어나온 나무 기둥이나 캔틸레버에 추를 매달았다. 그는 거의 확실하게 합금인 '구리'의 강도를 상당히 정확하게 측정했다. 하지만 1680년 에듬 마리오트가 증명한 것처럼 돌출 보의 아래쪽 섬유는 압축 상태이고, 위쪽 섬유는 인장 상태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캔틸레버에 대한 그의 테스트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편 로버트 훅은 응력을 받는 모든 물질은 어느 정도 변형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갈릴레오의 영감을 받은 그의 조수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는 큰 진전을 이뤘다. 스테빈은 유체역학을 연구하면서 물의 압력이 수심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토리첼리는 정수압동역학을 연결하여 정수압에서 물과 같은 유체가 마치 구멍 위로 유체의 깊이와 같은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구멍을 통과할 때 빠르게 통과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음 단계는 1650년경 토리첼리와 동시대 프랑스 인문주의자인 블레즈 파스칼에 의해 쉽게 이루어졌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원리로 이 명제를 축소했는데, 이 원리는 모든 초등 물리학 학생에게도 친숙한 원리이다. 파스칼의 원리는 '밀폐된 유체의 일부에 압력을 가하면 그 압력이 유체 안의 모든 곳에 같은 크기로 전달된다'고 하는 원리를 정리했다. 이 원리를 적용한 오늘날의 유압식 프레스는 업계의 요구에 따라 압도적인 힘을 전달한다.

 

토리첼리와 나중에 파스칼은 상단이 닫힌 튜브의 진공 상태에서 액체 기둥을 이용해 공기의 무게 균형을 맞추는 기압계 개발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연이 진공을 싫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에 오류가 있음을 밝혀냈다. 그들은 자연은 채울 힘이 있는 빈 곳만을 싫어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1643년 토리첼리의 튜브 상단은 대기의 무게 때문에 수은을 밀어 넣을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1648년에 파스칼은 산 정상보다 해수면에서 튜브에서 수은의 높이가 더 높이 상승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같은 이유로 흡입 펌프로 그 위의 공기를 배출하는 것만으로 물기둥을 해수면에서 33피트 또는 34피트 이상의 높이로 올릴 수 없었다. 이 물기둥의 무게는 그 위에 있는 대기의 무게와 같았다. 1650년 독일의 오토 폰 게리케는 기압과 기압의 부재를 실험하면서 수 세기 동안 알려져 있던 물 펌프를 공기 펌프로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유명한 마그데부르크 구의 공기를 너무 많이 배출하여 대기의 압력이 양쪽에서 8마력의 힘으로 당기는 16마력의 힘에 대항하여 두 부분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물론 8마력의 닻을 잡아당기는 힘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대기압을 다루는 공학적 문제를 연구하는 세이버리, 뉴코멘 등,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의 발견을 위한 길이 빠르게 열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페르마르네 데카르트는 공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해석기하학을 독자적으로 발견했다. 새로운 기하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은 페르마의 설명보다 더 체계적이고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발견에 대한 주된 공로를 인정받는 것은 데카르트이며, 그를 기리기 위해 데카르트 기하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데카르트의 위대한 업적은 대수학을 기하학에 접목하여 대수 방정식으로 곡선을 표현하거나 그 반대로 표현하는 분석 방법을 기하학에 도입한 것이다. 엔지니어에게 해석기하학의 큰 가치는 온도와 압력, 속도와 동력 등 수많은 변수 사이의 관계를 쉽게 분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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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태어난 네 사람은 공학에 큰 가치를 지닌 탁월한 과학적 공헌을 남겼다. 그들 중 두 사람은 18세기까지 살았지만, 네 명 모두 스테빈, 갈릴레오, 토리첼리, 파스칼, 데카르트의 세기에 속하는 인물이다. 세 명은 영국인이었고, 한 명은 네덜란드인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훅,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아이작 뉴턴이다. 로버트 보일은 공기의 탄성을 연구하여 1661년 또는 1662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법칙을 공식화했다. 이 법칙은 프랑스인 에듬 마리오트가 독자적으로 발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정한 온도에서 주어진 양의 이상기체는 가해지는 압력에 반비례하여 부피가 변한다. 즉, 압력이 증가하면 부피는 감소하지만, 이 둘의 곱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따라서 보일과 마리오트는 엔지니어가 '완벽한' 기체를 다루는 일은 없지만 엔지니어를 위한 기본 원칙을 확립했다. 그리고 옥스퍼드 실험실에서 훅을 조교로 삼아 보일은 현대적인 설계의 첫 번째 공기 펌프를 만들었다.

 

로버트 훅은 런던의 그레셤 대학에서 시계용 헤어 스프링의 탄성을 직접 실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물리 법칙을 공식화했다. 장력을 받는 물질은 당기는 힘에 비례하여 길어지고, 압축을 받으면 같은 방식으로 짧아진다. 이 관계는 재료에 따라 달라지는 탄성 한계까지만 유효하다. 유리나 특정 종류의 강철과 같은 일부 재료는 탄성 한계가 잘 정의되어 있지만 구리처럼 탄성 한계가 없는 재료도 있다. 어쨌든 특정 재료의 탄성 한계는 실제 실험에서 찾아야 한다. 훅은 아치에 작용하는 여러 힘을 분석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안한 '유니버설 조인트'도 개발했다. 이를 통해 샤프트의 힘을 다른 샤프트에 전달할 수 있으며, 샤프트와 비스듬히 연결되어 있다.

 

한편 로버트 훅보다 더 침착하고 다재다능했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시계 스프링을 나선형으로 개발하여 진자시계를 발명하고 진자를 사용하여 중력 가속도를 측정했다. 갈릴레오가 관찰한 것처럼 주어진 길이의 진자는 무게나 흔들림의 범위와 관계없이 일정한 주기로 흔들린다. 하위헌스는 수학적 천재성을 역학 연구에 접목했다. 그는 물체가 곡선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데 필요한 반경 방향 또는 구심력을 결정하는 공식을 도출했으며, 이는 과학뿐만 아니라 공학에도 필수적인 공헌을 했다. 프랑스의 재무부 장관이자 예술 후원자였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1666년 프랑스 아카데미 창립 기념식에서 이 네덜란드 과학자를 프랑스 아카데미로 초청해 명예 회원으로 추대했다.

 

이 네 명의 과학자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과학자는 아이작 뉴턴이다. 그의 『프린키피아』의 중요한 부분을 읽을 만큼 오랫동안 일을 떠나는 엔지니어는 거의 없지만, 근본적인 사고가 없었다면 이 직업은 훨씬 더 열악했을 것이다. 그의 동시대 독일인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도 미분적분학, 즉 뉴턴이 플럭시온이라고 부르는 변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속도 또는 비율을 계산하는 미적분학을 발명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도 농부 출신의 이 겸손한 영국인이 개념, 추측, 추론의 미로를 헤치고 운동의 세 가지 기본 법칙을 설명한 것은 바로 뉴턴이었다. 엔지니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법칙이다. [1] 모든 물체는 외부의 힘으로 그 상태를 바꾸지 않으면, 정지 상태 또는 직선으로 균일하게 움직이는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 [2] 운동의 변화는 가해진 가속도에 비례하며, 그 힘이 가해진 직선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3] 모든 작용에는 항상 반대되는 반작용이 있다. 즉, 두 물체의 상호 작용은 항상 평등하며 서로 반대되는 부분으로 향한다.

 

17세기의 측량 도구는 로마인들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디옵트라는 천문학자가 1616년에 이동식 조준 장치를 장착한 눈금 호를 채택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변경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짧은 거리를 측정하는 데는 여전히 나무 막대가 사용되었다. 들판의 크기나 도로의 길이는 종종 둘레가 알려진 원주 자나 바퀴로 측정했다. 이 방법은 평평한 땅을 제외하고는 지도 제작에는 부정확했다. 지도가 표면 투영이기 때문이다. 1600년경 영국에서 등장한 9개의 링크로 이루어진 측량사의 와이어 체인은 1620년 이후 66피트 길이의 100개 링크로 이루어진 건터의 체인에 자리를 내주었다. 나침반은 12세기 초, 아마도 그 이전부터 중국에서 사용되어 항해자와 측량사 모두에게 계속 도움을 주었다. 네덜란드의 젊은 수학자 빌러브로어트 스넬리우스는 1615년 약 80마일 거리의 삼각형을 연속으로 배치하여 지구 표면을 측정하는 삼각 측량 시스템을 최초로 사용했으며, 평면 측량과 구별되는 측지 또는 구형 측량을 최초로 실천했다. 피에르 베르니에는 1630년에 엔지니어에게 매우 유용한 장치를 발명하여, 그의 이름이 사전에 등장하였다. 버니어(vernier)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측정 눈금이 나란히 놓여 있어 서로 밀어서 작은 부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1608년에 발명된 망원경은 장 피카르가 1669년 파리와 아미앵 사이의 삼각측량에서 거미줄의 십자선을 추가하여 사용했지만, 1800년 이후에야 일반 측량 장비의 일부가 되었다.

 

계산에는 결정적인 개선이 있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에서 동일한 양의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0을 발명하고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면 이집트 시대 이후 1586년 스테빈이 십진수에 관한 논문을 쓸 때까지 계산 방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엔지니어들이 계산의 속도와 정확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고, 2세기 후 미터법의 토대를 마련했다. 엄격한 개신교 신자이자 스코틀랜드의 영주였던 존 네이피어는 1594년경 대수를 발명하고 1614년에 표를 발표했다. 네이피어의 친구이자 제자이자 그레샴 칼리지의 첫 수학 교수였던 헨리 브릭스는 10을 기준으로 대수를 설정했다. 주어진 수의 로그는 주어진 수로 올리기 위해 밑변에 곱해야 하는 횟수이다. 따라서 3은 공통 또는 브릭스 시스템에서 1,000(10×10×10)의 로그이다. 영국 교회의 성직자이자 ‘불쌍한 설교자’였지만 뛰어난 수학자였던 윌리엄 오드레드는 1622년경 기계적으로 조잡한 계산자를 발명하면서 기계적인 덧셈과 뺄셈으로 곱하기와 나누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데 로그를 적용했다. 또한 오우드레드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을 가르쳤고, 아이작 뉴턴이 연구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파스칼과 라이프니츠는 모두 계산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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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경에 상아로 제작된 네이피어의 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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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계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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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 계산기

 

오늘날 엔지니어들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과학자들 덕분에 측정하고 계산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와 무게는 적어도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측정되어 왔으며,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시간 측정은 하위헌스와 그의 진자시계, 그리고 과 그의 시계 용수철에서 시작되었다. 재료의 강도에 대한 과학은 갈릴레오마리오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테빈은 힘을 더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수압과 기압의 측정은 스티빈, 토리첼리, 보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외에도 네이피어, 브릭스, 오드레드, 데카르트, 파스칼, 뉴턴, 라이프니츠 등이 현대 공학의 기반이 되는 복잡한 계산 체계에 공헌했다.

 

유럽에 거주하던 서구 시민들은 서로 빈번하게 접촉하며 살았다. 그들은 자유롭게 섞이고 소통했다. 그들의 생각은 빠르게 교환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고, 종종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논쟁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의 싹을 틔우기도 했다. 이들은 플라톤의 아카데미,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과 같은 방식으로 학문적 사회를 형성했다. 레오나르도는 아카데미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는 1560년 나폴리에서 '자연의 비밀 아카데미'라는 이름의 아카데미를 시작했지만, 성직자의 의심을 받아 아카데미를 폐쇄했다.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추정되는 동물의 이름을 딴 스라소니 아카데미는 1603년에 설립되었으며, 한때 폐쇄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회원 중에 델라 포르타와 갈릴레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계획은 "수도원이 아닌 수도원을 지구의 4분의 1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비공식적이고 비밀스러운 회의를 통해 성장한 런던 왕립학회는 1662년에 창립 허가를 받았다. 보일, 훅, 뉴턴과 함께 회원 중에는 하위헌스, 현미경학자 말피기, 레이우엔훅, 프랑스에서 증기를 실험한 파팽 등이 있었고, 1666년에 프랑스 아카데미가 시작되었다. 1700년에 라이프니츠가 베를린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인쇄에는 전혀 지연이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이 등장한 1454년 이후 거의 모든 주제에 관한 책이 증가했다. 교회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과학자들과 그 수혜자인 엔지니어들의 출판물은 당시의 관심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피렌체의 건축가 레오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30년 전부터 축적해 온 건축에 관한 노트는 1485년에 출판되었다. 이듬해에는 비트루비우스의 작품이 인쇄되었고, 존 슈테는 1563년에 건축에 관한 최초의 영어 저서인 《비트루비우스에게 의지하여》라는 책을 출간했다. 1540년에는 야금학에 관한 바노치오 비링구치오의 《야금 기술》이 출판되었고, 16년 후인 1556년에는 독일의 게오르그 바우어 또는 조지우스 아그리콜라가 광업과 야금학에 관해 더 널리 알려진 《금속의 재구성》이 출간되었다. 이 두 저서는 모두 사후에 출판되었다.

 

정역학에 관한 스테인의 연구는 1585년에, 자기에 관한 길버트의 연구는 1600년에, 네이피어와 스넬은 1614년과 1617년에 저서를 출간했다. 데카르트는 1637년 라이덴에서 추론에 관한 담론을 발표했고, 갈릴레오의 《대화》도 1638년 라이덴에서 인쇄되었다. 1687년까지 보일, 파스칼, 후이겐스, 라이프니츠, 뉴턴의 작품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와 그림만 생전에 인쇄하지 못했다. 한편, 공상적이고 실용적인 기계에 관한 삽화 책들이 인쇄소를 통해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뮌스터의 《코스모그라피아》(1550년), 베송의 《악기와 기계》(1578년), 라멜리의 《다양한 기계》(1588년), 베란치오의 《새로운 기계》(1595년), 존카의 《새로운 기계》(1607년), 브랑카의 《기계》(1629년) 등이 있다. 이 책 중 현대에 복각된 책은 거의 없지만, 세계 유수의 도서관에서 원본 판본을 볼 수 있는 책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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