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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은 육지에 농업 정착을 가능하게 했지만, 통제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파괴자였다. 성서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유프라테스 계곡의 홍수로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주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관개시설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하천을 수로로 만드는 제방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었을까? 홍수를 막기 위해 댐을 만들고, 저수지로 바꾸려고 제방을 만들고, 가물었을 때 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파낸 운하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수메르와 바빌론의 초기 건설자들은 수력공학 분야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바빌로니아의 가장 위대한 신인 마르두크(Marduk)에 대한 많은 전설이 있다. 어떤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처음으로 땅의 물속에서 용을 정복했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기원전 25세기경 점토판에 기록된 동시대의 역사적 문헌이 더 신뢰할 만하다. 여러 왕이 공사하고, 때로는 국경 역할을 했던 운하나 특정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를 자주 언급한다. 아마도 기원전 2000년 전 우르(Ur)의 세 번째 왕조 후기 문헌에는 운하와 저수지의 고유 명칭이 많이 인용되었으며, 수리하거나 청소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언급되었다. 기원전 1800년 또는 1750년의 함무라비의 편지에는 운하 청소에 관한 내용이 있으며,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는 관개 수로의 적절한 유지에 관한 부분이 있다. 수학자 노이게바우어(Neugebauer)와 호르스트 삭스 (Horst Sachs)는 수학 설형 문자 문서에서 운하 건설 사업과 관련된 수학을 다루는 점토판을 언급하였다. 이 점토판의 연대는 적어도 기원전 1800년 이전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시작된다. 최근에 해독된 점토판은 아마도 기원전 1200년으로 추정되는데, 관개 도랑에서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한 일종의 수차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것은 한 남자가 17개의 계단, 20피트 길이의 물레바퀴를 빌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법적 문서이다. 문서에서 그것은 분실되었고, 그것을 새로 교체해야 했었다.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의 낮은 댐과 하천 작업 중 남은 부분은 계속 침식되었고, 강과 운하의 경로가 너무 바뀌었기 때문에 현대 엔지니어들은 명백한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남아 있는 둔덕과 능선은 유프라테스 하류 땅을 보호하는 제방이 너비가 30미터, 길이가 수백 km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사막의 큰 낮은 지역으로 높은 물을 운반하기 위한 배수로가 있었을 것이다. 이 낮은 지역은 1700km2에 달하며, 7.6 미터 깊이까지 물을 담을 수 있었다. 그러면 그 당시의 건설자들은 어떻게 댐과 제방을 방수하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만들었을까? 가두어진 물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고 어떻게 그들의 큰 저수지를 여닫을 수 있었을까? 고고학자들은 아직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마리브 댐

 

고대의 위대한 댐 중 하나에 대해 이용할 수 있는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다. 오늘날 사막인 홍해의 아라비아 해안은 성경에서 시바의 여왕으로 대표되는, 2000년 이상 동안 번영하는 농업 및 상업 사람들을 지원했다. 기원전 10세기 그들이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솔로몬 시대)을 한 이유는 언덕에 비를 저장하고, 겉흙을 침식으로부터 보호하고, 관개시설을 제공하는 거대한 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소수의 서양 탐험가만이 이들 중 가장 큰 마리브(Marib)또는 예멘 댐이 있는 장소에 들어갔다. 공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길이가 2마일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엄청났을 것이다. 높이 20피트, 바닥 폭 500피트, 1,500만 입방야드의 돌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에서 댐의 크기가 그 크기의 4분의 1도 안 되고 흙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것은 서기 6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실패했을 때는 아마도 방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바 여왕의 백성들이 수력공학에 대한 지식을 사막 넘어 북쪽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로부터 얻었는지, 아니면 홍해 반대편의 이집트인들로부터 얻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개발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장 열정적인 설명이 맞는다면, 그들의 마리브 댐에는 세계의 또 다른 불가사의가 있었다. 최근 작가인 조지 케이랄라(George Kheirallah)는 1936년과 1947년에 마리브 댐의 매장된 유적을 조사한 다른 아랍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댐의 길이가 650미터이고, 5개의 배수로와 14개의 관개 수로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 탐험가들은 구조물의 원래 높이에 대해 약간 모호했지만, 유난히 좋은 화강암 벽돌의 유적을 발견했다.

 

제르완 수로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Nineveh) 위쪽 제르완(Jerwan)에 있는 낮은 능선이 도로이거나 댐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발굴 작업으로 그것은 아시리아 왕 센나케립(Sennacherib)의 기술자들이 기원전 7세기에 건설한 수로라는 게 입증되었다. 니네베에 물을 공급하려는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길이가 300미터가 넘고, 폭이 20피트가 넘는 수로로, 한 지점에서 계곡 위로 10미터 높이에 솟아 있고, 아치형 다리로 개울을 건너는 것이었다. 건설에는 최소 2백만 개의 석회석이 사용되었다. 수로의 바닥은 아직 강도가 남아 있는 석회로 만든 콘크리트로 포장되었다. 센나케립은 자신이 아시리아와 세계의 왕이라고 선포한 다음 신왕으로서 이 계획이나 그와 유사한 계획을 놀라울 정도로 자제하면서 후손에게 남겼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다. “먼 거리에 있는 하주르강과 퍼풀리아강의 물, 하누사 마을의 물, 감가마라 마을의 물을 합쳤다. 그리고 산들의 샘물이 좌우에 있고, 니네베 초원에 운하를 팠느니라. 깊게 파인 계곡 위에 나는 흰 돌 블록으로 된 수로를 만들었다. 내가 그 위에 물을 흐르게 하였느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자기 엔지니어와 직원들에게 공을 돌렸다는 것이다. 니네베의 센나케립 궁전 벽에 놓여 있는 석고(alabaster)로 만든 대형 부조는 산간 지방에서 얼마나 무거운 조각상을 운반했는지를 보여준다.

 

중동에서는 샘이 가까운 곳이면 포위 공격을 받을 때 물을 공급하기 위해 터널을 통해 성벽 안에 있는 웅덩이로 물을 끌어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여자들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매일 이 깊은 웅덩이의 긴 바위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당시에는 주택에 배관을 연결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별 주거용 수자원 시스템은 사실 지금도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이런 종류의 터널은 기혼(Gihon)이라는 샘에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실로암(Siloam) 못까지 물을 운반했다. 배관은 높이 1.8미터, 길이 530미터였으며, 대략 곡선형이었으며 단단한 암석을 절단했다. 공사는 양쪽 끝에서 시작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일꾼들이 서로의 곡괭이 소리를 듣고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만났다. 그들의 경험과 기쁨에 관한 비문은 1880년에 수영장에서 목욕하던 소년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수 세기 동안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엮어주던 관개시설은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진 지 너무 오래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 키루스(Cyrus)는 티그리스강의 방향을 30개의 운하로 바꾼 다음, 흙으로 만든 댐으로 주요 수로를 막았을 것이다. 어쨌든, 목재로 보강된 거대한 흙 구조물의 잔해가 남아 있다. 언젠가는 윗면에 벽돌이 덧댄 것 같다. 이 댐은 마루두크의 이름을 땄으며, 키루스보다 천 년 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401년쯤. 유명한 그리스 군인 크세노폰(Xenophon)은 이 운하 연결망을 보고 그의 책 아나바시스(Anabasis)에서 이것을 주의 깊게 묘사했다. 그는 다리 없이는 건널 수 없는 운하를 끊임없이 만났다. 때때로 이 다리는 벽돌과 목재로 고정되었고, 때로는 배들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이 운하는 티그리스강에서 흘러나왔고, 도랑은 전국 각지에 하나씩 연결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 수로 중 첫 번째는 매우 컸고, 다음은 더 작았으며 마지막은 단순한 배수구였다.

 

이 운하는 중요한 공학 기술이었지만 메소포타미아 사람들과 그곳에서 운하를 파는 것을 배운 사람들은 발굴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적어도 기원전 482년에 페르시아 정복자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로 가는 길에 그의 부하들에게 아토스 지협을 건너게 한 운하 이야기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타나 있다. 그는 자신의 대규모 군대와 함대가 이전 원정대가 에게해에서 난파되었던 폭풍우가 치는 곶을 지나 안전하게 이동하기를 바랐다. 헤로도토스는 엔지니어 아르타카이에스(Artachees)가 키가 작지만, 엔지니어 중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낸 방법을 설명하는 것을 기뻐했다. 역사가는 공학에서 중요한 사실에 민감했다. 그는 발굴된 물질이 어떻게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옮겨지고 현장에서 제거되었는지 기록했다. 그는 작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운하의 측면을 수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 특히 주목했다.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페니키아 기술자들은 운하의 상단을 하단의 두 배 너비로 만들었다. 그들은 땅에 굴착된 운하에는 경사진 제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인더스 계곡의 하라파

 

인도 서부 인더스 계곡에 있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버려진 유적지에는 수력공학에 대한 고대 지식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담겨 있다. 아마도 그들의 주민은 이집트인과 수메르인에게 영향을 준 초기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친척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재 부분적으로 발굴된 모헨조다로 유적지는 현대 기준에도 효과적인 하수도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찍이 기원전 2500년에 당국은 왕족 외에는 다른 곳에서 누렸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평균적인 위생적 편의를 집주인에게 제공했다. 각각의 큰 집에는 창문이 없었지만, 우물이 있었고, 오히려 그 근처에 욕실, 변소, 화장실, 오물통, 쓰레기통이 있었다. 주택과 공공건물에서 나오는 폐수는 흙을 구워서 만든 배관으로 모든 거리를 따라 연결된 벽돌 배수구로 운반되었고, 들판이나 하천으로 이어지는 벽돌 배수로로 배출되었다. 도시에는 약 7 × 12미터 크기의 벽돌 웅덩이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의문이다. 깨끗하지는 않더라도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두꺼운 벽이 점토와 역청으로 방수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물고기 연못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그곳은 의식적으로 몸을 담그고 깨끗하게 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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