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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rocket)은 로켓에 포함된 연료를 연소시켜 만들어진 가스를 노즐(nozzle)로 후방에 분사하면서 생긴 반작용으로 추진력을 얻어서 전방으로 날아가는 비행체를 말한다. 또는 추진 시스템인 로켓의 액체 엔진(engine)이나 고체 모터(motor)를 직접 가리키기도 한다. 로켓은 추진력을 만드는 에너지 물질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서 산소가 희박한 대기권과 산소가 없는 진공 상태의 우주 공간을 비행할 수 있다.

 

로켓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로켓의 역사는 화약(火藥)의 발명과 함께 시작하였다. 10세기쯤 중국에서 초석(질산칼륨)을 주성분으로 흑색화약(black powder)을 발명하였다. 이후 13세기쯤 중국이 화약을 이용한 화전(火箭)이라는 무기를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이 화약 기술이 송(宋)에서 원(元), 인도, 아라비아를 거쳐서 유럽에 알려지면서 불꽃놀이와 무기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영국의 윌리엄 콩그리브는 고체로켓에 안정봉을 붙인 무기를 개발했다. 이 로켓은 대략 3,000m 가까이 날아갔고, 영국군은 이 로켓을 사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1814년 미영 전쟁에서 영국군의 함대가 미국 동해안의 도시인 볼티모어의 요새를 공격할 때, 콩그리브의 로켓 무기를 사용하였다. 이때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미국의 젊은 변호사가 쓴 시가 현재 미국 국가이며, 그중의 한 구절에서 ‘로켓의 붉은 불꽃(The rocket's red glare)’이란 말을 찾을 수 있다.

 

그 뒤 영국의 윌리엄 해일은 로켓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회전시키는 스핀 안정형 로켓을 고안했다. 하지만 당시 총포가 엄청나게 발전해서 정확성이 떨어지는 로켓은 전쟁에 별로 쓸모가 없었다. 이처럼 화약의 발명으로 시작된 로켓은 ‘과학’으로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무기’로만 발전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로켓의 우주 비행 가능성을 연구한 3명의 선구자가 있었다.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청각 장애가 있었지만, 홀로 로켓을 연구했다. 그는 우주여행용 액체로켓을 고안했고, 질량비, 다단식 로켓 등 로켓 공학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57년 구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였다.

 

1924년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미국의 로버트 고더드는 로켓 추진을 이용한 우주여행을 연구했고, 1926년 3월 액체산소와 케로신(kerosene, 등유)을 이용하여 액체로켓 발사 실험을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때 비행시간은 2.5초, 도달 고도는 12.5m를 기록했다. 그가 1919년 『고고도에 도달하는 방법』이란 책을 출간했을 때,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클라크 대학의 로버트 고더드 교수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진공 상태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른다.”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1969년 7월, 아폴로 우주선이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을 향해 비행할 때 뉴욕타임스는 “뉴턴의 발견은 옳았다. 로켓은 진공 상태에서도 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라고 정정하였다.

 

로버트 고다드

 

루마니아 태생의 독일 과학자 헤르만 오베르트는 소년 시절부터 우주여행에 열중하였고, 기구한 운명을 겪으면서도 평생 우주를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1923년 『행성 공간으로의 로켓』이라는 책을 써서 우주 비행의 기초 이론을 확립하는 동시에 우주여행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전문가들에게 혹평을 받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잘 팔렸다. 게다가 그의 영향으로 1927년 독일에 ‘우주여행협회’가 설립되었고, 젊은이들 사이에 굉장한 붐을 일으켰다. 이것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나치(Nazi)가 출현하면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이었다.

 

헤르만 오베르트

 

이상 3명의 선구자는 로켓의 우주 항행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생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천재 과학자였다. 하지만 정부를 움직여서 조직적으로 우주개발을 시작하는 구상은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꿈을 좇는 과학자’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초기 베르너 폰 브라운을 중심으로 나치독일은 길이 14m, 발사 중량 13t의 로켓인 보복 병기 2호(V-2)를 개발하였다. V-2는 1942년 10월 독일군의 실험장에서 발사되었고, 예정대로 60km의 고도까지 비행에 성공하였다. 이것이 근대 제1호 로켓의 탄생이었다. V-2는 최고 속도 마하 5(음속의 5배), 약 300km 떨어진 곳에 750kg의 ‘탄두(彈頭)’를 떨어뜨릴 수 있는 본격적인 로켓이었다. V-2의 액체로켓과 유도 기술은 당시에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Wernher von Braun.jpg

V-2 로켓에 인공위성 발사 능력은 없었지만, 대형화하면서 다단식으로 개량하면 우주로켓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Fusée V2.jpg

 

2차 세계대전 이후 V-2의 기술은 미소 양국으로 연결되었으며, 이후 대형 우주로켓을 개발하는 길을 개척하였다. 독일의 페네뮌데에서 V-2를 개발한 폰 브라운 박사와 100명이 넘는 로켓 기술자는 미국으로 건너가 전후의 우주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특히 폰 브라운은 지도자로서 미국의 가장 빛나는 시대의 우주개발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3명의 선구자처럼 ‘꿈을 좇는 과학자’가 아니라 시스템 공학에 뛰어난 ‘실무형 지도자’였다. 전후 소련, 미국,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우주로켓을 개발했지만, 이것은 모두 V-2 로켓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흑색화약: 질산칼륨 75%, 황 10%, 숯가루 15%를 배합한 화약. 

1812년전쟁: 나폴레옹 전쟁 도중 가혹한 해상 조처로 말미암은 미국의 불만이 주원인이 되어 벌어진 미국과 영국 사이의 전쟁으로 미영전쟁이라고도 한다. (1812.6.8.~1814.12.24.)

※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한 나치 독일의 과학자 642명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우주로켓] 냉전,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전 세계의 사람들, 특히 미국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이듬해인 1958년 1월에 바로 ‘익스플로러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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