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6. 22:37ㆍ과학/과학사
1789년은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해 라부아지에가 ≪화학원론≫을 출간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라부아지에 연구의 집대성이자 이전의 연금술사로서 신비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책이었다. 이 책에는 모든 화학물질의 성질을 나타내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이 책은 현대 화학의 시작을 알리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는 그 명성에 취해 있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징세 청부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라부아지에의 생활과 연구는 징세 청부업자로서 받는 수입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징세 청부업자는 미움의 대상이지만, 당시 징세 청부업자는 민중의 적이었다. 그리고 혁명 지도자 중 한 명이자 화학자였던 장 폴 마라의 원한을 사게 된다.
“라부아지에는 해외에서 화제가 된 발견을 자신의 발견으로 발표한 사람이다. 자신에게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도 없고, 모두 남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어서 가볍게 버리거나 자기의 이론을 수시로 바꾸어 버린다.”
라부아지에는 세금 징수액을 속인 죄와 반혁명 활동 혐의로 기소되어 1794년 5월, 50세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과 함께 사라졌다. 동시대 한 연구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머리를 자르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 정도의 두뇌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다.”
처형되기 전날 밤, 라부아지에는 친구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에서 그는 “되도록 약간의 찬사와 함께 기억되기를 바란다”라고 적었다. 현재의 평가를 알면 그는 분명 기뻐할 것이다. 물론 라부아지에가 자신만의 위대한 발견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발견을 해석하고 분석함으로써 발견자 못지않게 화학계에 이바지한 것이다.
다른 의견으로는 장 폴 마라는 한때는 의학자를 지망했으나 라부아지에에게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라부아지에가 숙청당하고 1년 후 사형당할 때 개인적인 감정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가 초기에 면허 없이 의료행위를 하기는 했지만 당대에는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고, 결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왕족의 후원을 받을 정도로 의사로서 명성이 꽤 높았다. 라부아지에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을뿐더러, 라부아지에의 직업이었던 징세 청부업자라는 게 자기 구역에서 재주껏 세금을 뜯어다 일정액의 상납금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먹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엄청난 원한을 사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고, 따라서 최우선적인 숙청 대상 중 하나였다. 결정적으로 라부아지에가 체포, 구금되어 처형당한 것은 마라가 죽은 다음이었고 다른 징세 청부업자들과 함께였다. 오히려 라부아지에는 혁명 초기에 혁명정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아 미터법 도입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으나, 마라가 암살된 후 공포정치가 펼쳐지자, 그 영향으로 숙청당한 것이다. 마라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마라가 죽는 바람에 죽게 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과학 > 과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학] 화학자의 전쟁, 제1차 세계대전 (0) | 2025.03.09 |
---|---|
[과학] 로맨틱한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 (0) | 2025.03.07 |
[과학] 화학 분해로 만든 수소 (0) | 2025.03.04 |
[과학] 기구 전쟁, 그리고 가스 전쟁 (0) | 2025.03.03 |
[과학] 라부아지에의 만찬회 (0) | 2025.03.02 |